시집 『ㅅㅜㅍ』 (문지사, 2015.11.11)
[푸른바다거북] - 김소형
동이 트는 순간에
바다에 가면
안다
밤과 바다가 갈라져
오렌지빛, 눈 뜨는
그 순간에
어깨에 천을 둘러싼 채
젖은 머리칼로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사실 나는 그를
안다
눈이 움푹 파인,
조용히 웃음 짓던 그 사람
말없이 바다에 빠진 그 사람
이제는 새벽마다
바다에서 기어 나오는 그 사람
그를 보러 간다
가끔 소리 질러도
그는 슬쩍 고개를 돌릴 뿐
아주 느리게 어딘가로 가느라 정신이 없다
커다란 석물을
등에 짊어지고
새벽마다 나오는 사람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등에 새긴 채
그들과 걷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돌을
바다에 세우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이곳은 묘혈이 되었다
누구도 넘지 못할
그런 거대한 무덤이
변진섭 노래 중에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1987)가 있다. 그 노래에서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라는 구절을 기억한다. 모든 인간은 ‘인생의 무게’로 넘어진다. 어쩌다 넘어지기도 하고, 아주 넘어져 죽기도 한다. 우리는 언젠가 넘어진다.
드물지만, 김소형 시인의 몇몇 시들에서 서정적 묘사를 읽을 수 있다. ‘동이 트는 순간에 바다에 가면 안다’라고 시작하는 위 시가 그렇다. ‘동이 트는 / 순간에 // 바다에 가면 / 안다’처럼 2음보씩 나뉘어 읽혀지는 깔끔한 리듬은 서정에 잘 어울린다. ‘커다란 석물을 / 등에 짊어지고 // 새벽마다 나오는 / 사람들’ 하는 구절은 마치 ‘인생의 무게’를 말하는 노래를 듣는 듯하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등에 새긴 채 그들과 걷고 있었다’ 할 때, 그 ‘남자’는 화자의 남자이면서, 독자인 ‘나’일 수도 있다. 우리가 짊어진 것은 ‘인생의 무게’가 분명하고, 그 ‘커다란 석물’을 어딘가 세우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묘혈’일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제 무게에 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김소형 시들이 읽기에 곤란한 이유는, 그가 비상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데 있다. 가령 위 시의, 동이 트는 바다에서 ‘젖은 머리칼로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그것이다. ‘말없이 바다에 빠진 그 사람’이 그것이다. 새벽 바다에서 젖은 사람들과 거기서 기어 나오는 그를 말하는 상상력은 낯설다. 그러나, 그 바다를 인생으로 바꿔 읽어보면, 사람들이 왜 저 깊은 곳에 빠져 있는지, 그가 왜 커다란 석물을 짊어지고 그들과 걷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게 사는 일이다.
상상력은 적당한 거리만 유지한다면, 빛난다. ‘동이 트는 순간에 바다에 가면, 안다’는 화자처럼 독자는 적당한 상상력을 읽으면, 안다. 시인을, 시를, 그 아름다움을.
(2016.6.23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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