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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6

풍경이 열어놓은 정서 – 이윤학 [외딴집]

시집 『어떤 백야』 (문지사, 2016.7.13)

 

‘Open to interpretation’이라는 말이 있다. ‘해석의 여지라는 뜻이라는데, 영화 인셉션에서 마지막 장면이 그것이다. 조그만 팽이가 돈다. 팽이가 넘어지면 현실이고, 넘어지지 않으면 꿈속을 뜻한다팽이가 위태롭게 회전하는 동안 영화가 끝난다. 관객들은 제 나름의 해석, 즉 그 영화 속 주인공이 현실로 복귀한 것인지 영원히 꿈속을 헤매는 것인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아니, 제 결론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섰을 것이다. 영화가 의도했던 것이 현실과 꿈의 불가분(不可分)이었다면, 그 엔딩의 ‘open to interpretation’은 매우 성공한 셈이다.

 

이윤학(1990년 등단) 시집이 그러하다. 그의 시는 대상에 대한 호오(好惡)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 그는 대상의 배치와 자세를 통하여 감정을 먹선처럼 어렴풋이 짐작하게 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것은 풍경화에 가깝다. 그렇다. 시인은 말로 풍경을 그리는 화가이다. 홍성 하리 선착장, 의왕시 내손동, 청평 같은 특정 지역은 물론이고, 빗물 펌프장, 사일로(옥수수 저장탑), 방 한 칸 같은 특정 장소도 보이고, 계단, 벽난로, 장독 같은 좁은 공간도 종종 묘사된다. 시가 그리는 풍경은 감정이 탈색되어 있지만, 대상들의 배치와 자세를 통하여 어떤 감정이 엿보인다. 분명하지는 않다. 감정을 탈색하여 오히려 감정을 증폭하는 그런 기술 - 시는 말의 풍경으로 깊은 서정을 보여준다.

 

[외딴집]          - 이윤학

 

늦은 꽃을 피워 서둘러 열매를 맺은 대추나무

아래 걸린 양은솥뚜껑 둘레에 물방울들이

주렁주렁 열린다 장작 연기와 수증기가 윤이 나는

풋대추를 문지르고 대추나무 주름을 더듬고

이파리를 간질이고 서로 어울려 먼 길을 떠난다

할아버지가 짐자전거 찜통에 얻어온 가든 음식물 찌꺼기

푹푹 끓어 넘쳐 양은솥 둘레에 개죽 국물이 타들어간다

양은솥 안 수없이 피고 지는 보조개 자국

개죽 냄새가 식으면 늘어진 젖을 들고 일어난 어미 개가

고개를 들고 짖을 것이다 자라지 않은 꼬리를 흔들며

강아지들이 양은솥 주위를 돌고 또 돌 것이다

양은솥 아궁이 불씨가 지기도 전에 할아버지

눈길로 이어진 별들이 흩어져

외딴집 하늘에 돋을 것이다.

 

위 시가 묘사하는 대상은 대추나무, 양은솥, 어미 개와 강아지, 그리고 할아버지다. “늦은 꽃 피워 서둘러 열매를 맺은 대추나무늘어진 젖을 들고 일어난 어미 개에 상응하는 이미지다. 늦은 열매를 맺은 대추나무도 아마 늙은 어미 개도 생산의 희열은 안 보인다. ‘장작 연기와 수증기가 윤이 나는 풋대추를 문지르고 대추나무 주름을 더듬고...라는 묘사는 짐자전거 찜통에 얻어온 가든 음식물 찌꺼기를 푹푹끓여 어미 개와 강아지에게 먹이는 할아버지에 상응하는 이미지다. 연기와 수증기 같은 자연 현상조차 대추나무를 위무하는 듯하고 어미 개와 강아지를 보살피는 할아버지도 그와 같은 자연 현상처럼 읽힌다. 그 대상들은 어우러져 외딴 오두막의 쳐진 삶에 매우 적격한 풍경을 보여준다.

 

그 적막을 무어라 읽어야 할까? 마지막 구절, ‘양은솥 아궁이 불씨가 지기도 전에 할아버지 눈길로 이어진 별들이 흩어져 외딴집 하늘에 돋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아궁이 불씨에서 할아버지 눈길(눈빛)로 다시 하늘의 별()로 이어지는 어떤 예감이 보인다. 그 불씨와 눈빛과 별빛으로 반짝이는 연속에서 희망을 읽기는 어렵다. 그 느린 연속은 상실의 끝점을 가리키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Open to interpretation’이 영화에서 결말을 해석하게 한다면, 시는 감정을 되새기게 해준다. 직접 말하지 않으면 감정을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모호함은 오히려 감정의 선을 더욱 굵게 만든다. 위 시를, 무력한 슬픔으로 읽든 죽음의 예감으로 읽든 혹은 서로 보듬는 위안으로 읽든 전적으로 독자의 몫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시가 ‘open to interpretation’, 해석을 열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해석의 열림은 말 없는 풍경에서 온다. 그 열린 풍경을 기웃거리다 보면 어느새 어떤 증폭된 감정이 보인다. 그때 정서는 오로지 독자의 것이다.

 

(2016.8.8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