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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6

독서의 기쁨을 주는 책 – 권혁웅 『시론』

(문학과지성사, 초판23, 2013.10.4)

 

책을 읽으면서 진도가 잘 안 나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개인차가 크겠지만, 내 경우 두어 시간 정도 집중하면 그 다음에는 집중도가 떨어져 그 책을 계속 읽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특이한 경험으로 책 내용이 너무 좋아 천천히 진도를 나가거나, 아예 멈추고 싶은 경우도 간혹 있다. 나의 한계와 책의 감동, 그 가운데 권혁웅 『시론』은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시에 관심이 있다면, 시를 읽고 이해하고 혹시 쓰는 데 보탬을 얻고 싶다면, 그 책을 읽고 다시 읽을 것을 추천하고 싶다. 그저 반복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읽고 얼마 후 다시 읽고 해보면 그 책의 넓이와 깊이를 절감할 수 있을 듯싶다. 2014년쯤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이 나라에도 인문학을, 그 가운데 문학을, 좁혀 시를 귀납적 원리로 연구하고, 그 성과를 탁월하게 내놓는 인물이 있구나 감탄했던 것 같다. 그 책은 시론 관련 다양한 주제들의 선구적 연구를 섭렵했고, 대개 현대시를 그 이론들의 사례로써 풍부하게 해석해 냈다. 말하자면, 이론과 실무 양쪽에 귀납적 원리를 실현한, 근면한, 탁월한 성과에 분명한 책이다. 그러나, 내가 처음 읽었을 때, 가령 책의 앞부분에서 주체대상에 대한 번쇄한 서양 이론들 같은 경우 이해 못하고 넘어가기도 했다. 책을 관통하는 내내 그런 몰이해는 무척 많았던 것 같다. 그간 그 책이 소개한 몇몇 주제들에 대한 나름 독서를 보탠 후, 이제 두 번째 그 책을 읽는 때, 그 책은 처음 읽던 감동을 훨씬 넘어서는 물건이다. 정말 물건이다. (한 친구가 추천해 준 김준오 『시론』 역시 좋은 책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론의 다양함에서 현재에 더욱 가깝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2000년 이후 현대시를 풍부하게 사례로 보인다는 점에서, 권혁웅의 것에 비교되기 어렵다고 본다.)

 

책을 통하여, 책이라는 체계적 성과와 시론이라는 학문의 깊이와 시라는 아름다움을 함께 엿볼 수 있는 경우가 흔하다 하기 어렵다. 물론 세상에 좋은 책 훌륭한 책은 많지만, 이 나라에서 시 관련 분야에서 이만한 성과는 정말 드물지 싶다. 아니 나는 못 보았다.

 

가령, 그 책에서 아래 문장을 읽어보자.

 

은유, 환유, 제유를 지적할 수 있는 곳에서 은유적 사고와 환유적 사고, 제유적 사고라 부를 만한 사고의 기저형(基底形)이 두드러지며, 이들이 시작(詩作)의 주요 방법론을 이룬다.”  (257)

 

이 한 문장에 얼마나 많은 이론이 압축되어 있는지 언급하는 것은 내 능력을 넘어설 뿐 아니라 내 의도를 벗어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요점만 꼽아보자. ‘은유적 사고’ (제유나 환유 역시 같음)라는 용어와 그 의미이다. 일반 상식은 ‘A=B’, 즉 은유는 명사를 바꾸는 것(명사간 전이)으로 알려져 있다. 그 좁은 상식으로는, 가령 기형도의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에서 아래 언술이 왜 아름다운지 밝히기 어렵다.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그 시에서 고드름=영혼이 명사 차원의 은유인 것을 알기는 쉽다. 이 문장은 그것 말고도 더욱 아름답다.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하는 부분이 그것이다문밖에 매달린 고드름을 형상하는 ‘영혼이 서성인다’라는 표현을 '서술적 기교'라고 말하는 정도로는 이 문장의 아름다움을 밝히지 못한다. ‘고드름=영혼은 단어 차원이 아니라 권혁웅이 『시론』에서 말하는 은유적 사고바로 그것이다. ‘고드름=영혼의 은유적 사고를 전제하기 때문에, ‘서성이다그리워하다’라는 의미를 품는 2차 은유가 된다. , ‘그리워하다=서성이다’는 아름다운 은유이다.

 

G. 레이코프는 『삶의로서의 은유』(권혁웅의 『시론』 중 은유 이론에서 부분적으로 인용됨)에서 은유적 개념을 웅변한다. 가령 시간은 돈 (Time is Money) ’이 그런 은유적 개념의 한 사례이다. 그 은유적 개념이 성립하면, "You’re wasting my time. (너는 나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라는 문장에서 wasting이 은유가 된다. ‘Time is money’는 관습적 은유개념이다. 그런 은유적 개념을 바탕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시간을 절약하다(save), 투자하다(invest), 빼앗기다(lost)' 등등 무수한 2차 은유로 말한다.

 

시의 은유는 그러한 관습적인 상투성을 상용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기형도는 고드름=영혼이라는 개인적 은유개념을 구축하고, 거기서 그리워하다=서성이다2차 은유를 파생시킨다. 이 사례는, 시에서 언술이 아름다운 중요한 근거를 설명하며, 권혁웅 『시론』의 위 인용에서 은유적 사고가 뜻하는 바를 예시한다. 그가 시작(詩作)의 주요 방법론이라고 결론짓는 그것이 바로 은유적 사고’ (레이코프의 은유적 개념) 에 의함이다.

 

시의 아름다움의 비결 하나가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비결 하나하나가 권혁웅의 『시론』에 있다. 읽다가 보면 발견되고, 읽을 수 있는 눈이 있을 때 더욱 발견되는 그것은 오롯이 시인이자 비평가인 권혁웅의 귀납적 성과이다.

 

추천한다.

 

(2016.8.15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