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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6

풍자와 연민 사이 – 장철문 [강가 강에 와서]

시집 『비유의 바깥』 (문학동네, 2016.6.10)

 

[강가 강에 와서]          - 장철문

 

참혹한 오물 속에서 몸을 씻고 있다

절대(絶對)에 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물을 떠서 정수리에 붓고 있다

 

짓뭉그러진 꽃과 타다 만 향과

사람을 태운 재와

똥과

녹슨 깡통과 죽은 암소와

 

신성(神性)은 절대여서 오물에 더럽혀지지 않는다

 

나도 저렇게 몸을 씻었다

 

허락되지 않은 몸에 몸을 밀어넣었다

시를 위하여 위선의 말을 밀어넣었다

침을 뱉은 자리에 이름을 밀어넣었다

 

시는 절대여서 허위에 더럽혀지지 않는다

 

강가 강의 물고기들은 죽어서

뒤란 반얀나무 그늘에 들 듯

하늘에 들겠지만,

하늘은 절대여서 비린내가 없다

 

물고기들은 절대 속에서 헤엄치고

화장터의 개들이 절대 속에서 어슬렁거린다

 

풍자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어리석음과 악덕,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문학형태다.” (김준오, 『시론』, 264) 풍자는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대상으로 할수록 신랄하기 마련이다. 약자가 할 수 있는 게 야유 이외 쉽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를 대상으로 할 때, 풍자는 연민에 가까워진다. 꼬집는 대상에 스스로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시집 『비유의 바깥』에서 시인은 두 곳을 기행(紀行)한 기록을 남긴다. 한 곳은 인도이고 다른 한 곳은 캐나다이다. 인도 여행은 마하보디선원 청소년명상캠프” (22)와 연관되는 공적 여행인 듯싶고, 캐나다 여행은 사적인 듯싶다. “오랫동안 형(시집 뒤 발문을 쓴 소설가 전성태는 시인을 이라 부른다)의 시는 두 갈래의 경향으로 지어졌다. 자연과 맺은 서정시들이 한 갈래이고, 다른 한 갈래는 구원에 바쳐진 자전적 시편들이다” (98) 두 여행은, 인도의 것이 자연과 맺은 서정시들에 가깝다면, 캐나다 것은 구원(久遠, ‘오래된 일을 뜻할 듯)에 바쳐진 자전적 시편들에 가깝다. 인도의 삶과 자연의 빈약이 시인에게 연민을 일으켰는지, 캐나다의 청정이 오히려 시인에게 과거를 암울하게 비쳐냈는지, 그저 짐작이다. 위 시는 인도의 강가 강(갠지스 강의 다른 이름)을 서술한다.

 

강가 강은 힌두교에서 숭배하는 강이다. 그 강은 빨래하고 놀이하는 삶의 강이고, 똥 싸버리고 화장한 시신의 재를 흘려내는 죽음의 강이며, 목욕하고 기도하는 믿음의 강이다. 2,500Km를 넘는 긴 강가 강이더라도, 도시를 거듭 거치는 동안 오염이 극심할 터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는다. “신성(神性)은 절대여서 오물에 더렵혀지지 않는다.” 사람을 태운 재와 똥과 녹슨 깡통과 죽은 암소가 둥둥 떠내려가도 그 강은 더렵혀질 수 없다. 시인은 그와 같은 절대 믿음을 시에 갖다 대어 본다. “시는 절대여서 허위에 더렵혀지지 않는다.”

 

그런가? ‘신성의 절대는 강의 오염으로 참혹해 보인다. 그 참혹은 그 믿음의 바깥에 있을 때 보인다. ‘시의 절대는 어떠한가? 시를 포함하여 글은 글쓴이보다 훨씬 아름답기 일쑤이다. 훨씬 윤리적이기 쉽다. ‘시의 절대또한 그 믿음의 바깥에 있을 때 우스워 보일 수 있다. 시집 표제 『비유의 바깥』은 어쩌면 시인이 서고 싶은 자리이다. 믿음의 바깥, 비유()의 바깥에서 보면, 참혹과 위선이 보이고, 그 허위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같은 생명이, 자신이 보일지 모른다. 그것은 소망일까, 또 다른 믿음일까? 알 수 없다. 그리하여 강물에 똥을 싸고 시신을 태우고 계속 위선하면서, 절대 신성은 망가지지 않으리라 믿는다. 믿으므로 더욱 똥 싼다.

 

이만한 문명 고발을 말하기 쉽지 않고, 이만한 자기 반성과 연민을, 그 한숨을 듣기 쉽지 않다.

 

 (2016.10.8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