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그녀에서 영원까지』 (문학동네시인선, 2016.9.30)
“전위는 기존의 모든 ‘체계’, 곧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양식을 의심하고 파괴하는 반체계이며, 따라서 전체성의 맥락에서는 체계화, 양식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체계들을 체계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반양식화의 원리다.” (권혁웅, 『시론』, 611)
[횡단을 위한 주파수] - 박정대
그는 검지로 탁, 탁, 탁, 탁자를 쳤다 오후였다
탁자에는 침묵이 한 컵 놓여 있었고
음악은 책갈피 사이에 소리의 그림자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놀란 세계처럼 오후의 언덕을 넘어갔다
후드득 후드득 말발굽 소리를 내며
아카시아 꽃잎들이 떨어졌다
언어로 서술되는 모든 과거는 현재다
끊임없는 현재가 횡단을 위한 주파수를 결정한다
머리카락은 오후에도 자랐고
바닷속 깊은 곳에서도 태양은 빛났다
여름이었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고
또 누군가 그런 풍경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말을 찾고 있었다
말을 타야지만 광활한 오후를 횡단할 수 있는가?
한 컵의 침묵을 마시고
그는 여전히 과거형으로 시를 쓰고 있었다
세계는 그의 피부 곁에 밀집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내면을 횡단할 주파수를 찾고 있었다
빵을 사러 가야 하는데
빵가게는 멀고
수염은 자라고
한숨은 무겁다
박정대 (1990년 등단) 시집 『그녀에서 영원까지』는 전위적 시집이다. 전위를 기존의 양식을 의심하고 파괴하는 반체계라고 할 때, 그의 시집은 틀림없는 전위이다. 한 시집에 수십여 편 시들이 실릴 때, 보통은 1부, 2부, 3부처럼 목차를 구분한다. 박정대의 것은 “말갈이나 숙신의 언어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같은 문장으로 부와 부 사이를 나누고 있다. 보통 시집들은 시를 앞세우고 시집 뒤에 평론가의 ‘발문’ 내지 ‘해설’을 덧붙인다. 박정대의 것은 ‘발문’과 ‘해설’을 연달아 놓으면서, 그 글쓴이들이 또한 박정대 자신이다. ‘발문’은 ‘장드파’라는 프랑스 시인이 박정대를 인터뷰한 기록처럼 보이지만, 사실 장드파는 박정대가 내세운 가상 인물이다. 그 발문은 박정대 자신이 자기를 인터뷰한 셈이다. 그러면서, 그 인터뷰는 시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충분한 발문이다. ‘해설’은 시로 시를 해설하는 시도이다. 말하자면, 박정대 시집은 시작부터 끝까지, 시부터 발문과 해설까지 모두 시다. 그 시집은 전체로 전위를 이룬 시집이다.
전위는 형식은 물론 내용을 파괴한다. “전위는 기존 양식 자체를 의문시하는 게 아니라, 그 양식을 가능하게 하는 규범 자체를 의문시한다.” (권혁웅, 같은 책, 620) 박정대가 시집의 형식을 유쾌하게(?) 파괴하였다고 할 때, 그가 또한 내용의 파괴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건 어려울 것 같다.
그의 시집에서 여러 키워드를 읽을 수 있다. 그 가운데 두 가지 꼽는다면, 하나는 ‘시’고 또 하나는 ‘내면’이다. 위 시 [횡단을 위한 주파수]는 그러한 키워드를 품고 있는, 시인의 말마따나 “나는 어떻게 보면 늘 같은 시를 반복해서 쓰고 또 쓰고 있다”(49)는 그 반복되는 변주 가운데 짧은 편을 고른 것이다.
시의 화자는 ‘그’다. 그는 혼자 어느 오후 탁자에 앉아 있다. 탁자 위에 물 한 컵, 음악이 흐르고, 그는 책을 읽고 있다. 책에는 놀라운 세계가 있다. 시에 서술되는 환상적 풍경들은 책의 내용과 연관된다. “언어로 서술되는 모든 과거는 현재다”. 책은 지나간 누군가의 언어의 서술이다. 그걸 지금 읽고 있으므로 책의 과거는 나의 현재이다. “끊임없는 현재가 횡단을 위한 주파수를 결정한다”라는 언술은 저자보다 독자로써 그가 읽어내는 현재의 의미를 강조한다. 미지를 횡단하는, 혹은 세계를 수신하는 주파수는 그 자신의 선택이다. 그 주파수란 그에게 '말'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말을 찾고 있었다 / 말을 타야지만 광활한 오후를 횡단할 수 있는가?”에서 말은 말(馬)이 아니라 말(言) - 동음이의어의 말장난이다. 그가 찾고 있는 말은 “내면을 횡단할 주파수”이다. 그가 찾는 '내면의 주파수'- 그것이 시다.
이 시는 시에 대한 시다. 제 시에 대한 의도를 드러내는, 이를테면 메타시이다. ‘그’를 통하여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시는 '내면의 주파수'이다. 그 주파수에 맞추면, 독자는 그의 말을, 시를, 그 전의(傳意)를 들을 수 있다.
별거 없다. 시집과 위 시의 내면에 가득찬 것은 ‘고독’이다. "빵 사러 가야 하는데 / 빵가게는 멀고 / 수염은 자라고 / 한숨은 무겁다"는 결구는 그가 토해내는 시인으로서 그저 한숨이다. '내면의 주파수'에 값 하는 빵과 빵가게는 시인의 몫이 아니고, 따라서 한숨만 나온다. 고독은 흔하여 값이 싸지 않은가, 시인이여!
그러나, 박정대가 보여주는 것은 많다. 그가 이룬 형식의 전위는 충분히 유쾌하다. 그 시집에 있는 시제(詩題) 중에서 [오, 박정대]와 [아, 박정대]는 그가 스스로를 감탄하는 치기만은 아니다. 독자들은 그를 읽을 때, 그렇게 읽어줄지 모른다. 오, 박정대! 아, 박정대! 우리는 유쾌한 고독 하나를 가졌다.
(2016.10.14.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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