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창비시선 411, 2017.8.31)
“세계는 이편과 저편으로 나누어진 장소가 아니라 몸의 감각으로 이루어진 불투명하고 불균질한 곳이므로, 어떤 프레임이 선명할수록 자신을 선으로 규정하기 위해 악을 발명하고자 하는 욕망의 가능성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적어도 자신의 내면을 경유하지 않은 언어가 문학이 될 수 없다는 지극한 사실을 돌이켜 함께 떠올리면 좋겠다.”
위 인용은 『창작과비평』 2017겨울호에 실린 신용목(1974-) 시인의 제19회 백석문학상 수상소감 일부이다. 그의 네 번째 시집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가 수상작이라는데, “시대현실을 관통하는 가운데 타자에 대한 깊은 사유와 자유로운 언어적 모험을 감행함으로써 ‘세월호 이후의 시’가 다다른 일단의 성취를 보여준다”는 심사평이 붙었다. 얼핏, ‘시대현실을 관통’한다는 심사평과 ‘내면을 경유하는 언어’라는 시인의 소감은 엇박자가 나는 것처럼 보인다. 가만 생각해 보면, 세월호 참사가 있은 이후 시에 정치적 함성을 더하고 윤리적 반성을 보태는 시도들이 있었고, 그러한 시도들은 응당 그래야 하는 타이밍을 맞추었다. ‘세월호 이후의 시’라는 말은 함성과 반성의 시기를 넘어서는 다른 타이밍에 들어서고 있다는 진단이며 관찰이다. 그 다른 타이밍에, 시대현실을 관통하면서 ‘내면을 경유하는 언어’로써 시가 쓰여져야 한다는 심사평과 소감은 시론(時論) 혹은 시론(詩論)을 다른 듯 비슷하게 말하는 셈이다.
심사위원 중에서 안도현 시인은 신용목 시집을 가리켜 “경이로운 조형술로 빚은 시”라고 상찬한다. 신용목의 시는 천천히 읽을수록 언어의 ‘조형술’에 감탄하게 된다. 그 가운데 짧은 한 편을 골라본다.
[무서운 슬픔] - 신용목
뱀은 모르겠지, 앉아서 쉬는 기분
누워서 자는 기분
풀썩, 바닥에 주저앉는 때와 팔다리가 사라진 듯 쓰러져 바닥을 뒹구는 때
뱀은 모르겠지,
그러나 연잎 뜨고 밤별 숨은 연못에서 갑자기 개구리 울음이 멈추는 이유
뱀이 지나가듯,
순식간에 그 집 불이 꺼지는 이유
뱀이 상징하는 무엇이 있다. 신용목의 [무서운 슬픔]에서 뱀은, 연잎 뜨고 밤별 숨은 연못에서 개구리 울음을 멈추게 하는 이유이다. 뱀이 지나가면 개구리 울음이 갑자기 멈출 것이다. 캄캄한 어둠 속 어떤 개구리는 뱀의 기척에 다만 숨죽이고 있을 것이고, 어떤 개구리는 영문도 모른 채 뱀의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이다. 뱀이 지나간 후 연못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개구리 울음으로 또 가득찰 것이다. 그와 같이 “순식간에 그 집 불이 꺼지는 이유”, 그것을 뱀이 모르고 개구리들이 모른다는 것은 삶과 죽음에 관한 슬픈 알레고리이다.
“시대현실을 관통하는 가운데 타자에 대한 깊은 사유와 자유로운 언어적 모험을 감행”한다는 말의 뜻을 위 시에서 엿볼 수 있다. ‘세월호 이후의 시’라는 평가는, 정치적 함성과 윤리적 반성을 거친 이후, 신용목이 지향하는 ‘내면을 경유하는 언어’의 성취를 높이 사준 것 같다. 개구리가 울음을 멈추는 사태는 시제처럼 [무서운 슬픔]일 것이다. 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구리를 운명(運命)하게 하는 뱀 역시 무소불위 하지는 못하다. 뱀은 ‘앉아서 쉬는 기분, 누워서 자는 기분, 또 풀썩 바닥에 주저 앉는 때와 쓰러져 바닥에 뒹구는 때’를 알지 못할 거라고 말해진다. 뱀을 신(神)으로 운명으로 권력으로 어떻게 읽더라도, 그것이 느낄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말에는 어떤 희망이 따라붙는다. [무서운 슬픔]은 개구리의 몫이겠지만, [무서운 슬픔]을 바라보는, 그 집 불이 꺼지는 이유를 살피는 시선이 있는 한, [무서운 슬픔]은 이제 기억되는 슬픔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호 이후의 시’는 쓰여진다. 슬픔 이후를 기쁨의 차례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슬픔 이후’를 제대로 말할 수 있을 때는 온다. 신용목 시는 그쯤을 말하고 있다.
(2017.12.14 진후영)
[사족] 시인들(아마도 선배 시인들)이 시인들(아마도 후배 시인들)을, 그들 작품을 그들 가운데 고르는 문학상 관행은 어딘가 어색하다. 바둑 1단이 9단을 누를 수 있는 것이 바둑이라는 프로의 세계인 것처럼, 시인의 경지에 들어서면 우열을 가누는 것이 관행에 불과한 일 같다. 그것을 대중의 몫으로 넘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문학상이 있어야 하고 더욱 많아야 하겠지만, 시인이 시인을 뽑는 곤란은 그만 치우는 게 좋겠다. 득실(得失)이야 있겠지만, 시인이 시인을 뽑는 제도는 ‘당신들의 천국’이기 십상이고, 가령 독자감상문을 공모하여 그 숫자와 무게로 시인상을 주는 방법도 가능할 것 같다. 할당된 상금은 독자감상문에 걸어 그것들을 유인하고, 시인은 독자에게 뽑히는 명예를 갖는다면, 감상문을 쓰기 위해 팔리는 시집으로 시인들도 알량한 상금 이상을 벌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인이 시인을 뽑는 몇 개 심사평을 읽다보니까, 거기 동료를 선별한다는 쑥스러움이 느껴져서 지나가다 던지는 훈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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