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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8

파산자의 재기 가능성 – 이다희, 승객

문학동네시인선100기념티저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2017.12.12)

 

  “문학동네시인선100기념티저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라는 긴 표제를 붙인 시집이다. 문학동네에서 시인선 100호에 이르는 기념으로 시인 50인을 모아 앞으로 발간할 시집을 맛보기로 선보이겠다는 티저시집이라고 한다. ‘티저광고가 간단한 예고로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처럼, 50인 시인마다 맛보기 시 한 편과 짤막한 산문 한 구절씩으로 시집을 엮어냈다. 보통 100, 200호 등의 기념 시집이 그간 출간된 시집에서 좋은 시를 선택하여 재탕하는 데 비하면 그 티저시집은 유례가 없다는 파격을 노린 셈이다. 성공적일까? 가타부타 말이야 할 수 있겠지만, 기획 때문에 성공하는 게 아니라 내용이 그것을 좌우하지 싶다. 결국 50인 시인마다 내건 티저시가 기획 의도를 잘 맞추었어야 한다. 시인들이 시는 잘 써도 돈 버는 재주야 없지 않는가. 아무래도 그들은 마케팅에 젬병이고, 7년만에 도래한 기회를 무심히 걷어차고 있는 것도 같다.

 

  기획 의도에 걸맞게, 어떻든 좋은 시는 있다. 그 한 편을 아래 붙인다.

 

승객          - 이다희

 

손에 쥔 표가 나의 유일한 표입니다

 

나의 뒤를 잡아채 길게 늘어진 풍경 속으로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를 뒤집으면 불꽃이 맺혀 밤의 어둠 속에서 눈이 얻는 이득이 무언인지 사실 불꽃은

너무 차가워요 너무 추워요 열차가 되지 않기 위해 나를 버티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찢겨 날리는 나의 뒤

 

이토록 넓은 창을 내는 용기가 열차를 위태롭게 합니다

나의 멀미가 열차의 무능은 아닙니다 열차는 레일을 읽어내려갑니다

나는 열차의 반항을

기나긴 복종을 읽어내려갑니다

 

잠의 도끼가 나를 한 번 두 번 내리치고 나의 가장 낮은 곳에서 들썩이는 도끼

미뤄둔 숙제를 하듯 도착한 도시와 떠나온 도시가 다르다고 받아 적으며

열차는 도시의 차가운 악몽이 되어 달린다

누가 이 도끼를 들어줬으면

 

누가 이렇게 열차를 뚫어놓았습니까?

안개를 찍는 도끼의 비명을 되감아

동면에 들어가는 자갈들

 

나는 열차가 아니다

도시가 아니고 날아오르는 발이 아니고

와본 적 없이 뚫린 구멍이 아니다 다음이 아니다

 

나는 다음이 아니다

 

부디 오늘

누가 이 레일의 끝을 덧대어주십시요

파산하고 돌아온 집에 오래된 침대가 누워 있습니다

 

  이다희(1990-) 시인은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고 한다. 시인된 지 겨우 1, 아직 첫 시집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티저시는 그가 예고하는 시집을 기대하게 만드는데 충분하지 싶다.

 

  시의 화자는 어둔 밤 귀향을 하고 있다. 그는 손에 쥔 표가 나의 유일한 표라고 한탄할 만큼 파산하여 쫓기듯 떠나고 있다. 화자는 제 심정을 열차에 빗대 살피고 더러 변명도 하고 있다. 열차가 달려갈 때 왼쪽과 오른쪽으로 풍경이 찢겨 지나가듯이 찢겨 날리는 나의 뒤라는 언술은, 화자가 도시에서 지낸 삶이 상처처럼 기억되기 때문일 터이다. 제 심정을 열차에 대상에 빗대는 것이 서정시의 전형이라지만, 화자는 제 심정을 열차에 기대지는 않는다. ‘열차가 되지 않기 위해화자는 기억을 더듬고, ‘넓은 창을 내는 용기가 열차를 위태롭게한다거나, ‘나의 멀미가 열차의 무능은 아니라거나 하는 언술들을 통하여, 비록 찢겨 날리는 파산한 도시의 삶이었더라도, 도시적 처신을 거부한 제 자신을 강변하고 있다. 열차는 작은 반항기나긴 복종을 의미한다. 아마도 그는 도시의 삶에 물드는 어떤 기나긴 복종을 하지 않았으리라. 화자에게 열차는 도시의 차가운 악몽이며, 열차를 타고 가는 귀향길은 도시적 처세를 반성하는 복기(復碁)일 터이다.

 

  대상과 불화(不和)하는 것을 서정시의 다른 지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이미 사례가 있는 서정시의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아름답게 구축한 다른 지평은 또한 새롭다. 새로운 것이란 새로운 것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새로운 것이란 아름다운 것에서도 온다.

 

  그의 '티저시'는 충분히 그의 첫 시집을 기대하게 만든다. 기획의도에 가장 근사한 그의 화자는 파산 이후 재기할 수 있을까?

 

(2018.1.9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