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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8

새로운 것과 재미있는 것의 간격 – 황혜경, 검은 외투를 하나 갖는 일


시집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06, 2018.5.25)

 

“시는 이해와 동의를 구하는 것이기보다는 프런티어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프런티어가 바로 현대성이라 할 수 있다. () 시의 현대성, 그것은 시를 미개간지에 서게 만드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수명, 『표면의 시학』, 140-141)

 

검은 외투를 하나 갖는 일          - 황혜경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말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 이런 말끝에 나는 검은 외투를 하나 갖고 싶어진다

 

일련의 사건들 다 덮어버리고 겨울의 검은 외투를 하나 갖는 일

외투 자락을 펄럭이며 왔던 곳으로 잰걸음으로 되돌아가는 일

사실 나는 의문투성이지만 재봉틀을 상상하게 하는 검은 외투를 하나 갖는 일에 대해선 극렬하게 찬성이다

이유가 불분명한 사건의 예시와 복선

깃을 여미고 외투 자락을 펄럭이며 짐작할 때는 의심하지 말아보자, 덮어두고 싶어지는 것이다

 

잠만 자는 주인에 대하여

개도

향수가 짙은 소녀에 대하여

소년도

너무 붉은 여자에 대하여

남자도

 

나도

한마디 해주고 싶었을 텐데

모르는 사연에 대하여 질끈 눈을 감고 입을 닫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 남은 의문에 대한 자답自答으로

검은 외투를 하나 갖는 일을 희망한다

 

내가 이 생生에서 서성이는 것은

길을 가다가 모텔에서 나오는 어린 연인들과 마주칠 때 같고

어찌할 바를 몰라 검은 외투의 깃을 세우고 먼저 등을 보이면 불편한 감각들이 고분고분 잠잠해질 것이니

 

비평가 신형철은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가 소망이라고 한다. (경향신문 [책과 삶] 2018.9.29) 그 말은 겨우 세 마디에 불과해도 함축은 넓고, 깊다. 작품을 정확하게 읽는 일은, 특히 현대시에서 일반 독자는 물론 비평가조차 쉽지 않을 터이다. 이수명을 인용한 서두 문장은 현대시가 새로움에 혈안이 되어있을 뿐, ‘이해와 동의’를 그리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반소비자선언(?)인 셈이다. 독자뿐 아니라 비평가 역시 소비자라면, 둘 다 현대시를 정확하게 읽는 일은 가끔 즐겁고, 자주 곤혹스러운 일일 터이다. 시 비평을 읽는 일은 대개 칭찬을 읽는 일이다. 허투루 쓰는 시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영화처럼 흥행하는지 마는지 시는 따지지 않는다. 비평가는 그 짧은 단문들에 제 세상을 담아내는 시를, 그 시인을 칭찬하는 사명을 가진 것도 같다. 시의 경지와, 시인의 노고와, 동료의식으로 비평가는 시를 칭찬한다. 신형철은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가 되겠다는 말로, 현상과 변명과 전망까지 비평을 간단(簡單)하고 있다.

 

황혜경(1973-)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은 ‘정확하게 칭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예제일 수 있다. 시집 뒤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박혜경은 “나는 지금 황혜경이라는 낯선 세계와 마주 서 있다. 시인의 언어는 그 안으로 들어가보려는 독자에게 좀처럼 길을 내주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 ‘독자’에는 박혜경 자신을 또한 포함한다. 그 해설은 ‘칭찬하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그러한 것 같지는 않다.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은 황혜경 시가 어떻게 다른가,는 질문과 같다. 그것을 확대하면, 현대시가 왜 다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답은 수천 갈래 있겠지만, 개연성이나마 여기서 읽어본다.

 

[검은 외투를 하나 갖는 일]은 황혜경 시를 읽는 난감함 가운데 그 정도가 약한 축에 속한다. 난해의 정도가 옅다는 말이다. ‘앞뒤가 어긋나는 불편한 문장들’도 없고, ‘맥락의 단절과 비약’이 적기 때문이다. 심지어 ‘검은 외투’는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은유를 피한다는 것은 인간 정신의 면면에 가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사물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은유를 버리면 사물이 보조적인 지위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수명, 같은 책, 57) 은유라고 했지만, 그것을 비유로 바꾸어도 틀리지 않는다. 은유(비유)는 관념 지향이며, 따라서 “(현대시는) 은유를 무력화시키며, 인간을 피하고, 관념의 조작을 제어”(이수명, 같은 책, 59)하려 한다. ‘검은 외투라는 상징은 그렇게 현대성의 규율을 크게 어기는 셈이다.

 

세상사에 불편한 일은 많다. ‘잠만 자는 주인에 대하여’ 개의 시선으로도, ‘향수가 짙은 소녀에 대하여’ 소년의 시선으로도, ‘너무 붉은 여자에 대하여’ 남자의 시선으로도 (‘붉은 여자’를 어떻게 읽든, 이 말은 환유에 가깝다), ‘모텔에서 나오는 어린 연인들’을 마주치는 나의 시선으로도, 세상사는 불편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검은 외투의 옷깃을 세워 불편한 감각을 숨길 수 있지 않을까. 순진한 발상 같지만, 세상사는 세상사대로 나는 나대로 무관하자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황혜경 시집을 읽다가 읽히지 않는 답답함을 벗고자 오규원(1941-2007)을 골랐다. 시인의 첫 시집 『분명한 사건』은 1971년산이다. 오규원 시인은 ‘언어적 명백함 혹은 구상성(具象性)’을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 시집의 표제시를 골라서, 황혜경 시 혹은 현대성과 차이를 읽어본다.

 

분명한 사건          - 오규원

 

안경 밖으로 뿌리를 죽죽 뻗어나간

나무들이

서산에서

한쪽 다리를 헛집고 넘어진 노을 속에

허둥거리고 있다.

키가 큰 산오리나무의 두 귀가

불타고 있다.

 

시간의 둔탁한 대문을

소란스럽게 열고 들어선

밤이

으스름과 부딪쳐

기둥을 끌어안고

누우런 밀밭을 밟고 온

그 밤의 신발 밑에서

향긋한 보리 냄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골목에서

작년과 재작년의 죽음이

서로 다른 표정으로

만나고

그해 죽은 사람의

헛기침 소리 하나가

느닷없이 행인의 뒷덜미를 후려치고 있다.

 

[분명한 사건]에는 사건이 분명하다. 골목에서 ‘행인의 목덜미를 후려치고’ 있는 어떤 기운이 있다. 그 기운은 ‘그해 죽은 사람의 헛기침 소리’ 같다. 거진 50년이 지났으므로, 위 시는 지금 현대성을 잃고 있다. 전형적 서정시의 문법이 읽히기 때문이다. 노을 속에서 한쪽 다리를 헛짚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R11에는 '헛집고'로 표기) 넘어지는 나무들이나, 대문을 소란스럽게 열고 들어서는 밤이나, 신발 밑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향긋한 보리 냄새나, 사물 혹은 현상이 사람인양 행위하고 있다. 그것은 화자의 심사를 사물에 투사하는 서정성의 기법이고, 은유이다. 세상사에 죽음은 산재하고, 어떤 기운은 인간의 목덜미를 후려치고, 세상사 혹은 사물은 사람과 유관하다는 태도가 여기 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황혜경과 오규원은 거의 50년을 시차(時差)한다. 세대가 다른 것은 시가 아니라도 필연이다. 비유를 탈색하여 사물을 사물로 남기든, 사건과 무관하게 사물과 나를 독립하든, 시에서 관념 내지 의미를 탈색하든, 새로운 것만이 새로운 것이고, 새로운 것이 현대성이라고 우길 수는 있다. 다만, 어떤 것이 더욱 재미있나,라는 질문에 현대시 내지 비평은 답을 하지 못한다.

 

나는 말하자면 오규원을 꼽고 싶다. 그 시절, 그의 시도 현대시였을 터이고, 읽히고, 짜릿했을 터이다. 이제 낡았지만, 아직 재미있다.

 

(2018.10.19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