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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8

서정 옹호 – 김학중, 열린 문

시집 『창세』, (문학동네시인선 093, 2017.4.30)

 

   “김학중의 첫 시집 『창세』는, 우리 시단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언어적 스케일과 형식을 갖춘 이색적 결실이다. 이 시집은 두 가지 점에서 배타적인 개성을 보여준다. 하나는 시인이 지난 10년간 우리에게 비평사적 화두를 제공해온 이른바 미래파와 같은 세대이면서도 그들로부터 미학적 거리를 크게 두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동안 한국 현대시의 주류로 기능해왔던 단형 시편의 흐름과도 확연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유성호, 시집 뒤 [해설] 중에서)

 

  열린 문           - 김학중

 

  도시의 지도엔 그저 커다란 공백으로 그려져 있다

  누가 문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누구도 연 적 없지만

  문이 아닌 그 문은 열렸다

 

  방음벽 뒤에서 바람에 뼈를 맡기고 서 있는 건물. 공사가 멈춘 후 층층이 먼지보다 먼저 침묵이 깃들고 시간은 아무 곳에서나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건물의 이름이 치워졌다. 건물은

  도시의 배설물이 되었다

  완성되지 못한 건물은 문이 되어갔다. 건물의 온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열어 보여주는지 알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건물의 방음벽을 더 높여야 한다고 했다. 가두고 싶었던 것은 소음이 아니라 그것이 열어놓은 어떤 미래였다

 

  있다. 단지 그것이 문이 우리 앞에 열어주는 미래였다. 그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수군대던 사람들은 어느 날부터 저 문은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나 허물어져가면서 빈, 공간이 되어가는 건물을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있음. 그들은 그것을 재난이라고 불렀다

  부수고 싶어도 부술 수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재난이었다.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야만 무너뜨릴 수 있는 한 채인 그것은

  문. 자꾸 무언가를 열어두고 열어놓은 문

  문이 여기. 있다

 

  누구도 주인이 아닌 누구의 주인이 아닌 그 문은

  도시보다 오래 살 것이다.

 

  김학중의 첫 시집을 읽는 일은 흥미롭다. 근간 시집이 흥미롭다는 것은 말 그대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만큼 현대 시집들은 독자를 유인하는데 실패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시집 뒤 해설에서 인용한 내용 가운데, 김학중 시집이 단형 시편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 배타적 개성이라고 동의해주기는 어렵겠다. 근래 시집들 중에 단형이 아닌, 그 대척이 장형인지 모르겠지만, 긴 산문 형식은 얼마든지 꼽을 수 있다. 김학중 시집의 특징은 이른바 미래파미학적 거리를 크게 두고 있다는 그것이지 싶다.

 

  2000년대 미래파라 불리는 시적 경향은 다양하지만, 그저 ()서정이라 해보자. 그것은 서정의 부정이 아니라 서정의 지평을 넓힌 것이라 이해되는 것도 같다. 서정에 충실한 시적 경향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보이는데, 하나는 대상을 빌려 말하기이고, 다른 하나는 비유이다. 나머지 하나는 각성이다. 대상을 강조할수록, 비유로 문장을 구성할수록, 시는 이름하여 ()서정한 셈이다. 김학중의 첫 시집은 형식에서 매우 친서정이다.

 

  경제가 활황일 때, 부동산 시장이 가장 전위이다. 마찬가지로 경제가 폭삭 주저앉을 때, 도시 곳곳에서 짓다 만 건물을 목격하기는 어렵지 않다. 위 시는 그렇게 짓다 만 건물, 그 흉물스런 뼈대를 대상으로 한다. 그 건물은 도시의 지도 상 커다란 공백이며, 도시의 이다. 그것이 문인 이유는 사람들이 닫아 가두고 싶기 때문인데, 소음을 가두고 흉물스러움을 가리려 한다. 하지만, 기실 가두어지는 것은 우리 앞에 열어주는 미래이다. 이때 미래라는 말에는 희망과 긍정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짓다 만 미래이고, 닫힌 문의 안쪽에 가두고 싶은 실패의 미래이다. 시적 대상인 그 건물은, 그 흉물을 가리고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인 우리 앞에 열어주는 미래라는 암울이다.

 

  ‘열린 문은 아이러니다. 닫기 위해 만든 문이고, 닫음으로만 역할한다. 문 안쪽의 흉물스러움은 주변 사람들에게 언제나 가능한, 어쩌면 예정된 실패의 미래이다.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야만 무너뜨릴 수 있는 한 채라는 말 역시 아이러니이다. 소유하는 이유가 버리기 위해서 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아이러니는 그 문제가 영원히 벗을 수 없는 절망인 것을 암시한다. 짓다 만 건물이 문이라는 개념은 시 전체를 지탱하는 은유이다.

 

  ‘그 문은 도시보다 오래 살 것이다라는 결구는 이 시가 도달하는 각성이다. 대상과 비유를 통하여 서정시가 흥미로워진다면, 각성을 통하여 서정시는 의미지향을 드러낸다. 그 문, 짓다 만 건물이 보여주는 실패의 미래는 우리의 미래여서 도시보다, 삶의 터전보다, 아니 삶 그 자체보다 더 오래 갈 것이라는 어두운 묵시론이 깔려 있다.

 

  위 시는 김학중 시집에서 대표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한 편이다. 흥미롭고, 의미지향 한다. 그런 흥미를 만드는 문장이 작의적이라 비판할 수 있고, 거기서 얻은 각성이 새로울 것 없다고 절하할 수 있다. 그러나 흥미와 각성은 예술이 대중에게 열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이 아닐까 모르겠다.

 

  어쩌면 도시의 지도에 그저 커다란 공백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가 아니기를 바란다. 시를 위해 시를 쓰는 그만큼 시가 우리를 위해 쓰여지는 그만큼도 있었으면 좋겠다. ‘배타적 개성이라는 말을 비평가는 상찬으로 했지만, 왠지 시류를 비켜 서있다는 옹호가 서글프다.

 

(2018.9.8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