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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22

오래된 서정 오래된 감탄 – 채길우, 햇살

시집 『매듭법』, 문학동네시인선 137, 2020.6.10

 

  “세계의 자아화가 서정시라는 주장이 있다. 자아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투사, 세계가 자아로 들어오는 것을 동화라고 한다 (…) 어느 쪽이든 서정시는 동일시의 산물이며, 이때 세계는 주체의 모노드라마가 된다. 시적인 대상이 주체의 발언을 대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권혁웅, 『시론』, P132

 

  익숙한 것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지 않을까? 이해가 쉽고, 따라서 지루하다는 두 가지 말이다. 오래된 서정시를 읽을 때 그 일란성 쌍둥이가 고개를 내민다. 현대시가 거진 서정시라고 해도, 오래된 서정과 새로운 서정은 다르다. 오래된 서정은 쉽게 읽히고, 새로운 서정은 한참을 읽어야 읽힌다. 오래된 서정은 정서에 치중하고, 새로운 서정은 감각에 치중한다. 정서에 치중한다는 말은 연민과 반성의 두 미감으로 삶의 이면을 감상(感傷)하게 만든다. 감각에 치중한다는 말은 미감 이전에 감각 그 자체가 마주하는 사물 혹은, 칸트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표상을 스캔한다.

 

자정으로부터 줄곧 미친

개 한 마리가 따라온다

짖어대는 소리에 쫓겨

오른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에 목을 매달고 새벽

나는 까뒤집힌 눈을 뜬다

-    채길우 [스누즈 알람]

 

차를 영영 사지 말아야겠다

돈도 없거니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밟고도

 

모를 것인가

-    최재원 []

 

  두 편의 짧은 시들을 오래된 서정과 새로운 서정의 사례로 골라 보았다. 채길우의 [스누즈 알람] (스누즈 알람은 기상 알람 방식에서 5/10분 간격으로 다시 울리게 만드는 기능)은 슬픈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낸다. 현대인은 충분히 잠잘 수 없다. 스누즈 알람이라도 사용해서 늦지 않도록 자신을 관리해야 한다. 자정이나 되어야 자리에 들어도 잠은 온전한 휴식이 되지 못한다. 정해진 시간,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강박 때문에 미친 개 한 마리짖어대는 소리에까뒤집힌 눈을 뜬다는 그 환유적 언술은 현대인으로서 자기 연민과 그런 삶에 대한 반성이 깊다. 연민과 반성은 오래된 서정의 한 사례이다.

 

  최재원의 []는 서정시지만 조금 다르게 읽을 수 있다. 차를 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많은 것들을 밟고도 모를 수 있는 감각 상실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 시가 실린 시집에서 시인은 매미와 탈피한 껍데기를 밟는 감각에 경악한다. ‘많은 것들을 밟고도 모를 감각을 피하려 한다는 말은 불교적 불살생 의지와 전혀 관련이 없다. 매미를, 그 탈피한 껍질을 밟을 때, “그서석버서석콰직쿠지직끼약꽥콰지지직” ([FULL VOLUME] 중에서) 소름 돋는 감각조차 없이, 아니 모르고 밟지도 않겠다는 행위의 이중부정(?)이다. 그것은 감각하는, 의식에 앞서는, 개념으로 나아가지 않는, 새로운 서정의 다른 사례이다.

 

  두 서정의 간격이 좁아 보이는 것은 두 시가 짧은 착시 때문이다. 그 간격은 마치 강을 건너기 전과 건넌 후만큼 넓고 멀다. 젊은 시인이 오래된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한계 아니면 위험한 선택일 거 같다. 한계라는 말은 그가 시를 부업 삼아야 하는 삶의 굴레에 갇히지 않았을까 하는 괜한 추측이고, 위험한 선택이라는 말은 그가 낡은 것을 보상할 시적 기재(奇才)에 올인하는 게 아닐까 하는 괜한 염려이다. 채길우 시인의 첫 시집 『매듭법』은 오래된 서정에 분명하지만, 그 시집은 미세한 시선과 풍부한 상상력과 아름다운 비유에 충실하다. 쉽게 읽히는 그걸 보상할 기재가 확실할 때 오래된 서정의 가치는 빛난다. 그 시집에서 대표작 같은 선택을 하기는 어렵다. 아무 시를 펼쳐도 시는 빛나고, 어떤 시도 쉽지만 쉽게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래된 서정에 오래 머물게 만드는 채길우 시의 매력이 거기 있다.

 

햇살 - 채길우

 

창을 열지 않았는데

찌그러진 블라인드 틈새로

한 조각의 작은 새가 들어와

손을 대보면

그 위에 앉는다.

손바닥에 꼭 맞는 거울처럼 따스해

주먹을 쥐어도 닫히지 않는

나를 통과하지 못하는 새가

잡히지 않아서

손목을 돌리면 손등에 와 있다.

새는 거기서 고요히

가슴을 조금 일렁이고

날개를 살짝 뒤척이는 것만으로

내 손을 환히 비춘다.

살빛에 녹아 반들거리는

내가 보일지

손톱이 껍질처럼 투명해

새는 무게 없이 유혹하는 동작으로

어깨 위로도 볼과 발등 위로도 건너와

바람 불지 않아도 아무 자국 없이도

꽁지의 잔 먼지와 거스러미 들을 흩날리게 하거나

어느새 깃털 색을 바꾸고 부리를 일그러뜨리며

나의 체온에서 오랫동안 열중하고 있는다.

그것이 오늘 오후

할 일의 전부인 듯

여기서 알을 낳을까?

 

그러나 새는 날아갈 것이다.

빈손을 펼쳐 저무는 하늘 쪽으로 블라인드를 걷고

눈 찌푸리지 않아도 슬픈 너머를 바라보게 된다면

그림자가 나보다 길어진 곳이

가지 잘린 나무처럼 멀고

 

나는 이 새가 노래할 때까지 기다리리라.

어둠을 지나 아침이 올 때까지

창을 열어

소리를 들으리라.

 

  어린 시절 그런 경험이 있을 수 있다. 아파트에 사는 요즘 아이들이야 그걸 경험할 가능성이 적겠지만, 방의 창문 사이로 작은 햇살이 한 줄기 들어와 방안 한 켠을 비추던 일 말이다. 햇살은 긴 막대기처럼 곧고 그 속에 먼지들이 부유하며 반짝인다. 어린 시절 그런 햇살 한 줄기는 잠시라도 시선을 사로잡아 기억에 남는다. 인용시 [햇살]은 그런 추억을 종알거리는 게 아니라, 지금 햇살을 한 조각 작은 새로 손바닥에 앉히고 손등으로 어깨로 볼로 조금씩 이동하며 만지고 있다. 그 작은 새를 잃어버린 영혼으로 읽든 도래할 생명으로 읽든, 연민이든 반성이든 그건 하등 중요하지 않다.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인용시가 읽는 독자를 한동안 잡아채는 힘은 두 가지 - 햇살을 작은 새로 바꾸어 전개하는 상상력과 처음부터 끝까지 새 이미지로 시를 관통하는 은유의 힘. 그 두 가지 힘을 시에서 분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만큼 상상력과 비유는 시에서 일란성 쌍둥이, 하나이다. 채길우의 오래된 서정은 이와 같다. 더는 해설할 것도 비평할 것도 없게, 오래 감탄하게 만든다.

 

(2022.4.29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