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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22

꽃이 피는 때 꽃이 피다,는 시 – 김남주, 잿더미

  여태 김남주(1946-1994) 시인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했다. 염무웅의 『한국 현대시』(사무사책방, 2021.12.15)에서 그에 대한 짧은 해설을 읽다가, 그의 초기시 [잿더미]를 찾아보았다. 그 시는 1974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실린 시인의 등단작이다.

 

  시인은 전두환 시절 앞 1년부터 뒤 1년까지 93개월을 감방 생활을 했더란다. 5공화국 그 엄혹한 시절 감방에서 우유갑을 해체해서 나오는 은박지에 못으로 시를 쓰고, 그걸 뼁기통(변기) 안에 숨겼다가 면회 오는 지인에게 전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염무웅에 따르면 "참혹하게 위대한, 최악의 상황에 대한 최강의 저항으로서의 장엄한 한 장면"(같은 책, 410)이라던가. 삶과 시를 철저하게 일치시킨 시인, 그의 언어는 단출하나 강력하다.

 

  [잿더미]는 시인이 투옥되기 훨씬 전에 쓰인 것이지만, 20대 후반 시인은 이미 정권의 수배와 핍박을 받았기에 과장이나 감상은 없다. 그 시는 꽃이다 피다라고 시작한다. 얼핏 꽃이 피다로 잘못 읽었는데, ‘= (blood)’라는 은유를 이처럼 단순하게 동시에 강렬하게 구사하는 사례도 흔치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삶과 시를 일치시켰기 때문 같다. 삶과 시는 다를 수도 같을 수도 있겠지만, 삶이 곧 시일 때 그 힘을 김남주 시에서 느껴본다.

 

  아무튼 목련이 피는 때 꽃이 피다,는 시를 읽어 본다.

 

잿더미          김남주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피가 보이지 않는다

꽃은 어디에 있는가

피는 어디에 있는가

꽃 속에 피가 잠자는가

핏속에 꽃이 잠자는가

 

꽃이다 영혼이다

피다 육신이다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

육신이 보이지 않는다

꽃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피의 육신은 어디에 있는가

꽃 속에 영혼이 깃드는가

핏속에 육신이 흐르는가

영혼이 꽃을 키우는가

육신이 피를 흘리는가

꽃이여 영혼이여

피여 육신이여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

그대는 바다의 심연에

육신을 던져보았는가

죽음의 불길 속에서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파도의 심연에서

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

 

꽃이다 피다

육신이다 영혼이다

그대는 영혼의 왕국에서

육신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그대는 피의 꽃밭에서

영혼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파도의 침묵 불의 노래

영혼과 육신은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던가

숯덩이처럼 검게 타버리고

잿더미와 함께 사라지던가

 

그대는

새벽을 출발하여

폐허를 가로질러

황혼을 만나보았는가

황혼의 언덕에서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

난파선의 침몰을 보았는가

승천하는 불기둥을 보았는가

침몰과 불기둥은 무엇을 닮고 있던가

꽃을 닮고 있던가

피를 닮고 있던가

죽음을 닮고 있던가

그대는

황혼의 언덕을 내려오다

폐허를 가로질러 또 하나의

새벽을 기다려보았는가 그때

동천에서 태양이 타오르자

서천으로 사라지는 달을 보았는가

죽어버린 별

죽으러 가는 별

죽음을 기다리는 별

그대는 달과 별의 부활을 위해

새벽의 언덕에서 기도를 드려보았는가

 

그대는 겨울을

겨울답게 살아보았는가

그대는 봄다운

봄을 맞이하여보았는가

겨울은 어떻게 피를 흘리고

동토(凍土)를 녹이던가

봄은 어떻게 폐허에서

꽃을 키우던가 겨울과

봄의 중턱에서

보리는 무엇을 위해 이마를 맞대고

눈 속에서 속삭이던가

보리는 왜 밟아줘야 더

팔팔하게 솟아나던가

잡초는 어떻게 뿌리를 박고

박토에서 군거(群居)하던가

찔레꽃은 어떻게 바위를 뚫고

가시처럼 번식하던가

곰팡이는 왜 암실에서 생명을 키우며

누룩처럼 몰래몰래 번성하던가

죽순은 땅속에서 무엇을 준비하던가

뱀과 함께 하늘을 찌르려고

죽창을 깎고 있던가

 

아는가 그대는

봄을 잉태한 겨울밤의

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그대는 아는가

육신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영혼이 어떻게 꽃을 키우고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는가를

 

꽃이여 피여

피여 꽃이여

꽃 속에 피가 흐른다

핏속에 꽃이 보인다

꽃 속에 육신이 보인다

핏속에 영혼이 흐른다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