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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24

비문은 언제 쓸 수 있는가 – 친구에게, 비밀로

 

  “말의 느낌과 형식에 주의하는 것은 말을 순전히 도구로 다루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언어가 상업과 관료주의에 의해 종잇장처럼 가늘게 닳아 버린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    테리 이글턴, 『시를 어떻게 읽을까』, P23

 

  친구 아들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예식장 결혼식에서 예식을 보지는 않는다. 인사하고 축의금 전달하고 식장의 분위기나 얼핏 들여다보고 식당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결혼식을 끝까지 관람하면서 재미있어 하기는 아마도 그 결혼식이 처음이지 싶다. 언제부터인지 결혼식이 바뀌어서 주례는 생략되고, 신랑이 입장하면서 막춤을 추고, 신부를 인도하는 도중에 아빠가 점잖지 못하게 더욱 막춤을 추기도 한다. 그 결혼식은 아예 시작부터 한복을 입은 양가 어머니들이 막춤을 추며 입장하여 하객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사회자는 짓궃게 질문한다. “신부는 신랑이 첫사랑이 맞습니까?” 그 아슬아슬한 질문에 신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올해 첫사랑이 맞습니다.” 축가가 불러졌다. 신랑의 아버지 - 내 친구가 무엇을 하는지 나는 안다. 그는 사업을 잘 하고 있지만, 사는 동안 시를 놓친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가 가사를 쓰고, 신부측 친구들이 작곡과 노래를 불렀다. 내 친구가 무엇을 못하는지 나는 또한 안다. 내가 보기에 친구가 시를 놓치고 사업을 하는 것은 좋은 선택 아닌가 싶다. 제 시가 가족에게 감탄받는다면 기쁜 일이다. 시로 모두에게 읽히고 싶은 것은 욕심이다.

 

봄날엔 향기에 취해

겨울이 있었음도 잊었습니다.

봄꽃이 눈으로 내려 기왓장처럼 쌓이는 날

날잎 윤슬에 맺힌 살라지는 바람으로 부드럽게

폭풍우처럼 무겁게 내 영혼을 흔든 그대

백날을 바라보아도 지치지 않을

시간 속으로 포개지는 두 손들이 있습니다.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가 내게 왔습니다.

 

  이 시는 노래가 안된다. 가사는 말의 리듬이 살아야 노래가 될 터인데, 거기 3음보 같은 말의 리듬을 계속 살리지 못하고, 반복의 후렴에 대한 배려 또한 부족하다. 이 시는 시가 안된다. 전체 4 문장 중에서 첫 문장 화자는 아버지고 (사는 동안 곤란을 아버지가 겪었고, 아들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나 곤란의 주체는 아버지였다는 점에서 화자는 아버지다), 둘째 문장 화자는 신랑이다. 셋째 넷째 문장 화자는 신랑 신부이다. 화자가 바뀌는 시가 있으나 이 경우는 그냥 시적 미숙이라고 보아야 한다. “날잎 윤슬에 살라지는 바람이라는 서술은 비문이다. 오리무중하지만, 나는 그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친구가 보여준 여러 시들에서 그런 비문을 여러 번 보았고 지적했다. 친구는 그 버릇을 고칠 생각이 없다. 지적질하는 나만 의를 잃은 셈이다. 무슨 배짱으로 비문을 고집 피우는지, 제 언어에 한끝도 타협 않는 게 시인의 자세라고 착각하는지 모르겠다. ‘살라지는은 어법에 없는 변형이다. ‘살다라는 말을 지다라는 수동형으로 변형한 것일 터이다. ‘불을 살리다는 말은 쓰지만 오늘날 불을 살라지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바람이 부드럽게 일어나는 표현을 굳이 비문으로 고집는지 알 수 없다. ‘날잎은 아마도 봄날 새로 돋은 푸른 잎일 터이나 역시 없는 말의 날조이다. ‘윤슬은 혼자만 아는 비유가 되는 셈이다. 윤슬의 사전적 의미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므로, ‘푸른 잎이 흔드는 잔물결에 일어나는 바람처럼 부드럽게라는 의미로 시적 묘사를 하려고 했을 터이다. 바람이 잎을 흔드는 게 아니라 잎이 바람을 일으킨다는 불교적 주객전도의 의도가 엿보이기는 한다. 이런 지적질은 친구간 의를 상하게 할 뿐, 친구 귀에 경읽기가 될 뿐이다. 해서, 이것은 친구에게 비밀이다.

 

  근일 『우시사 소식』에서 김언희 시의 비문을 읽었다. 시인의 비문과 친구의 비문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 살펴본다.

 

막기차를 놓치고

저녁을 때우는 역 앞 반점

들기만 하면 하염없이 길어나는 젓가락을 들고

벌건 짬뽕 국물 속에서 건져내는 홍합들…… 불어터진

음부뿐이면서 생은,

외설조차 하지 않을까

골수까지 우려준 국물 속에서

끝이 자꾸만 떨리는 젓가락으로 건져올리는

허불허불한 내 시의

회음들, 짜장이

더글더글 말라붙어 있는 탁자 위에서

일회용 젓가락으로 지그시

벌려보는,

상처의

 

모독의

 

, , , 시울들……

 

-      김언희, 「허불허불한」

 

  김언희 시인은 도발적 언어와 과격한 상상력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이전의 여성시 대부분을 내숭으로 만들었고 이후의 여성시 상당수를 아류로 만들어버렸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606) 인용한 시 역시 그 도발적 언어와 과격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그 시는 벌건 짬뽕 국물 속에서 입 벌리고 있는 홍합들을 음부라고 하고, 생은 왜 외설조차 하지 않느냐고 까발린다. 삶은 뒤로는 외설이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하는 치장 아니던가? 혹은 외설조차 못하고 한 생을 허비하는 게 아니던가? 그 문장에 시선이 닿을 때 시는 갑자기 통쾌해진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길어나는 젓가락에서 뭔가 목에 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길어지는이 아니고, ‘늘어지는도 아니고, 왜 없는 말 길어나는이어야 할까? 오식이 아니라면, 그 말은 시인의 오기(傲氣 또는 誤記)라고 해야 한다. ‘시울들이라는 말이 또한 시인이 만든 말인 것 같다. 눈시울은 눈가를 뜻하는데, 시울은 시의 가장자리를 말하는가? 알기 어렵다. 그 오리무중한 두 군데 말에 걸려서 나는 이 시를 몇 번씩 읽어보았다. 여전히 알 수 없는 가려움증이 거기서 일어나지만, 그 가려움증으로 이 시는 더욱 주목된다. 시인이 노렸든 아니든, 비문과 작어(作語)는 어쩌면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글턴이 말하듯이, 시적 언어란 언어가 상업과 관료주의에 의해 종잇장처럼 가늘게 닳아 버린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를 전복하는 게 상식을 전복하고 삶을 전복하는 시작일 터이다. 시가 세상은커녕 나 자신을 전복할 거라 기대하기도 어렵겠지만, 내 인식이 내 삶을 만든다는 걸 인정한다면, 내 언어가 내 인식을 구성하는 요소인 것을 최소한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언어를 전복하는 것이 내 삶을 전복하는 시작이 된다.

 

  해도, 자신의 언어를 통제할 수 있을 때 비문조차 통쾌할 수 있다.

 

(2024.5.11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