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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24

시와 귀신의 공공성 – 최지은, 부고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 창시시선 458, 2021.12.10

 

  “아버지가 자애롭지 않으면[不慈] 아들이 원망해도 되는가? 아직 안 된다. 그러나 자식이 효를 다했는데 아버지가 자애롭지 않아서 마치 고수가 순임금에게 한 것처럼 한다면 부모를 원망해도 된다.”

-    백민정, [왜 귀신의 공공성인가?], 『창작과비평 2024봄호』,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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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등포 구청은 공원을 바라보고 있다. 거기 공원은 자그마한 산책로와 벤치 그리고 놀이터 배드민턴 코트가 있다. 노인들은 산책로를 걷고, 벤치에 앉아서 지인과 환담을 나누거나 장기를 둔다. 아이들은 재잘거리고, 부모는 그들 그네를 밀고, 유모차에서 유아는 잠들어 있다. 도심의 공원이 대강 그런 풍경일 터이다. 노인과 아이와 부모, 그리고 행인들이 있다. 돌봄의 시선으로 보면, 그들 모두 돌봄 당사자들이다. 돌봄 시혜자와 수혜자 그리고 잠재자들. 노인과 아이는 돌봄 수혜자들이다. 부모는 말하자면 돌봄 시혜자들이다. 행인들은 그 공원에서 잠재자들이다. 모두가 돌봄에 엮인 셈인데, 그 공원 풍경을 둘러보는 내 눈에 노인들은 무표정하게 일람하는 군상일 뿐이고, 아이들은 재잘거려도 태평하게 잠들어 있어도 자연히 입꼬리 미소를 짓게 한다. 어쩌면 노인 돌봄과 아이 돌봄은 그와 같이 다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백민정의 글 [왜 귀신의 공공성인가?]는 다산 정약용이 살아서 고민한 주제 한 가지를 다루고 있다. 조선 유학자로서, 천주교 신자로서 다산은 조상 제사를 지내면서도 상제(천주=하나님)를 섬길 수 있는 길은 없을까?” (P319)라는 실천적 고민을 했는가 보다. 그 고민은 단순히 제사라는 유교적 도리와 유일신 하나님만을 예배한다는 교리의 상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 , 죽은 부모를 섬기는 일과 산 부모에 효도하는 실천적 윤리와 관련이 있다. 다산은 섬길 만한 귀신이라야 섬길 수 있다”(P326)고 보았다. ‘섬길 만한 귀신이란 ()과 덕()’을 가진 귀신, 귀신의 공공성”(P324)을 말하며, 다산은 공덕의 귀신을 섬기는 일은 상제의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다산의 사유는 공덕이 없는 귀신과 관련하여 독특하다. 그런 귀신을 섬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데, 거기 귀신에 대한 공경과 불경은 산 부모에 대한 공경과 불경의 윤리에서 같다. ‘아버지가 자애롭지 않으면 아들이 원망해도 되는가? 아직 안 된다. 그러나 자식이 효를 다했는데 아버지가 자애롭지 않다면 부모를 원망해도 된다는 그 말은 당대 얼마나 파격이었을까?

 

  다산의 사유는 현대 역시 위험하다. 다산에게 부모와 자식의 윤리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책무()와 함께하는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관계 원리였다.”(P329) 오늘날 자식에게 자애롭지 않은 부모 또한 흔히 있다. 그 부모가 늙었을 때 자식은 공경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자식조차 공경하지 않는 부모를 사회는 돌봄으로써 거두어야 하는가? ‘자식이 효를 다했는데라는 조건은 자의적이라서 허술하다. ‘자애롭지 않은 부모를 원망해도 된다는 결론은 그저 사적인 선택이어야 한다. 자식 이전에, 내 시야에 있는 노화를 거두어야 할 선량이 인간의 조건 아닐까? 사회는 더욱 약자 모두를 거두는 것을 조건으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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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의 귀신의 공공성이라는 사유에 견주어 시의 공공성을 말할 수 있을까? 시에서 의미를 읽어내려는 측은 시의 공공성을 반길 터이다. 시는 의미하고 해석되며, 공유되는 각성이기 때문이다. 시에서 시적 물성을 보려는 측은 시의 공공성을 낡았다고 치워버리려 할 터이다. 시는 언어로 구성되는 작품이며, 의미도 해석도 부차적인 혹은 거부하는 물자체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나는 전자에 기울고, 후자를 곁눈질하는 부류이다. 최지은 시는 시의 공공성 영역에 위치한다. 그의 첫 시집에는 온통 성장기에 관한 기억과 인상만이 있다. 첫 시집의 통과의례가 시인의 성장기라고 해도 대개는 몇 편을 기록하는데 그친다. 그가 붙들고 있는 불우한 가족사는 어떤 해석과 무슨 공유의 가치가 있을까?

 

  최지은(1986-)의 아래 인용시는 그간 내가 해설한 시들 중에서 가장 긴 편이다. 그 시가 돌봄이 주제라고 할 수 없지만, 부모와 자식간 자애와 공경의 원리를 읽어낼 수 있다. 자애하고 공경하는 그것은 상호적이지도 호혜도 아니고 본능이라는 윤리 아닌 감각.

 

  아래 인용시 [부고]는 얼핏 읽으면 본문과 시제가 무관하게 보인다. 읽어갈수록 어떤 불안감, 무력감, 그리고 깊숙한 상실감이 느껴진다. 시에서 화자는 가 낮잠에 비몽사몽인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 사실 화자의 과거 자신이라는 점에서 시는 회상이다. 시는 행갈이를 한 문단과 행갈이 없는 문단이 구분된다. 행갈이 문단은 관찰되고 있는 에 대한 서술이고, 행갈이 없는 문단 셋은 의 꿈속 사건이다. 행갈이 없는 문단 셋 세번째 문단은 저게 직박구리야.” 라는 한 문장의 목소리인데, 그 문장 끝에 마침표를 달은 것으로 보아 바로 위 행갈이 없는 두 문단들의 연장인 최후의 목소리로 보아야 한다. 그 목소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다. “저게 직박구리야.” 어릴 적 직박구리를 가리켜 알려주던 아버지는 탈 많은 그러나 그리운 혈육이다. 아마도 전화벨이 계속 울린다는 그 불안한 정황은 시제가 왜 [부고]인지 암시한다. 바로 아버지의 부고를 화자 는 그렇게 받았을 터이다.

 

  최지은 시가 시적인 힘은 [부고]에 잘 드러나 있다. 말의 절제와 리듬감, 젊은 시인들이 주력하는 서술형 문체, 그리고 시제와 본문의 암시적 관계 등등. 그러나 내가 느끼는 지루함은 나의 시적 편향 탓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부고          - 최지은

 

  맑고, 약간 더운 바람이 부는 일요일의 정오

  삶은 감자가 식어가는 여름이고

 

  돌아가는 선풍기에 안방 문에 늘어뜨린 발이 부풀었다 가라앉는

 

  너는 거실에서 마른 수건을 개다 말고

  한쪽 팔을 구부려 옆으로 눕는다

 

  수건에서 맡기 좋은 풀 냄새가

 

  방바닥은 숲의 언저리처럼 서늘해서

  어느새 숲을 기웃거리기까지 하고

 

  가느다란 비가 내린다. 직박구리. 작은 머리 작은 부리가 보이고. 직박구리. 너는 말하고 듣는 귀가 없고. 직박구리. 직박구리. 눈이 마주치고 멀어지지 않는다. 너는 손을 내밀어 새를 불러 앉히고. 살갗에 뭔가 스칠 때마다 조금 뜨겁고 조금 가렵고. 겨우 두어걸음을 걷는 동안

 

  숲이 좁아지고 물이 흐르고. 물가에 놓인 작은 베개. 너는 꿈속에서 다른 꿈을 부르려고 베개 위에 머리를 누이고. 태아처럼 웅크린다. 한쪽 귀가 물에 잠길 때. 저게 직박구리야. 아는 목소리가 들리고. 멀리 허공에선 아주 큰 독수리. 흰꼬리수리. 헛간 문이 날아오는 것처럼 아주 큰 독수리 날아들고 있다. 너는 어째서 너를 여기까지 데려왔을까. 깨달을 땐 너무 깊은 꿈속이라 움직일 수가 없다. 달려드는 흰꼬리수리를 바라보면서. 저게 직박구리야. 계속 중얼거리는 목소리. 아직 도착하지 않은 흰꼬리수리, 금방이라도 너를 낚아챌 듯, 날고 있다

 

  저게 직박구리야.

 

  눈을 뜬다

  깨고 나서야 어린 너에게 새 이름을 가르쳐주던 그 목소리를 알아채고

 

  목덜미와 겨드랑이에 살짝 땀이 나고, 열띤 두 뺨이 붉어져서

  흰꼬리수리 아직도 너를 내려다보는 것 같고

 

  물 한잔을 따르며 생각한다

 

  아버지와 연락을 끊은 지 여섯달이 지나고 있었다

 

  보리물에 떠다니는 찌꺼기를 건지려고 손가락으로 건드릴 때

  물고기처럼 달아나 잡히지 않았다

 

  숲과 삶은 감자와 보리물

  수건의 여름 속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두드러기가 손등 위로 번지고 있을 때였다

  두드러기. 두드러기. 두드러기.

  소리 없이 살결 위를 지나가는

  이 꿈을 어떻게 끝내야 할까

 

  두드러기. 두드러기.

  전화벨이 계속 울린다

 

  너는 잠든 것처럼 멈춰 서서

  오래도록 듣고 있었다

 

  여름이 식어가고 있었다

 

(2024.5.31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