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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24

촛불을 켜자, 벌받을 놈을 기도하자 – 강우근, 하루 종일 궁금한 양초

시집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시선 496, 202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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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명의 친구와 한 명의 선배를 만났다. 연말, 다들 지인을 찾고 그렇게 만나고 다시 헤어지고, 한 해를 그렇게 마무리하지 않는가. 삼겹살 굽는 술집에서 한 친구 행색이 전보다 초라한 것이 눈에 거슬렸다. 2년전에 못 보았던 피부병이 목주위에 불긋불긋했다. 아토피 피부병이라고 한다. 양계장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까, 먼지 때문에 얻은 질환이다. 오래 살아라, 그러려면 직업을 바꾸라,고 충고했지만, 한가한 소리가 되어 버렸다. 밑바닥에 가까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친구인 나도 어찌해 주지는 못하고, 덧없는 말이나 보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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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대학원 다니는 딸이 연구실에서 매일 늦는 게 안타까워서 데리러 가는 중이었다. 일주일에 한번 아빠 찬스를 쓰라고 했고, 미안해하는 딸에게 내가 날을 골라 가는 중이었다. 밤 11시 안되어, 대학교 연구동 앞에 차를 대놓고, 딸에게 나오라는 전화를 하고, 잠시 기다리면서 휴대폰에 뜬 속보를 읽게 되었다. 어라? 거기 계엄령 뉴스가 휘황했다. 밤은 깊고, 정신은 몽롱하고, 뉴스는 낯설었다. 아니 낯익었다. 집 오는 길이 어둡지 않았다. 여전히 차들은 제 속도로 달리고 있었고, 한가한 거리에 불 꺼진 가게와 불 끄지 않은 아파트 그리고 암만 피곤해도 핸드폰 화면에서 무언가 재미를 찾는 딸이 비스듬히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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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한 시쯤, 샤워를 하는 사이 상황이 끝났다. 나는 국회에서 190:0으로 계엄해제가 가결되는 장면을 놓쳤다. 이상했다. 싱거웠다. 2시간 30분간 상영된 공포영화가 한국식 저예산 때문인지 너무 허술했다. 이틀이 지났다. 혁명은 안 되고(오해 마시라, 시인 김수영의 푸념이다), 마누라를 지우산으로 때려눕힐 배짱은 애초 없었고(이것도 김수영 것 차용이다), 그는 그저 선택지 하나를 해본 듯이 여전히 건들건들하다. 그런 선택지를 또 쓸지 모르고, 더한 선택지를 제 권한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하야는 그의 사전에 없을 터이고, 탄핵은 여당의 계산 속에 안될 것 같다. 그냥 놔두어도 될지 걱정만 남는 요지경이다.
 
  그냥 놔두어도 괜찮겠나? 친구야, 딸아, 그리고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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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궁금한 양초          - 강우근
 
하나의 불이 꺼질 때 나의 영혼이 어디로 옮겨 가는지 궁금해
내가 희미해질 때 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은 전부 검게 물들어가는지
내가 사라질 때 또다른 빛을 보는 아이들의 표정은 얼마나 생생할까
어디선가 달리고 있을 아이들은 모래알처럼 빛이 날까, 초원의 풀처럼 자꾸만 솟아날까
용기가 없는 사람의 용기가 정말로 궁금해
잠들기 싫은 날에 나를 오래도록 켜놓은 사람의 다음 날이
힘을 내려고 밥을 푹푹 떠먹는 사람의 아침 인사가 궁금해
공기 중에 떠다니는 이 하얀 연기는 내가 말하는 방식일까, 당신이 말하는 방식일까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나를 자꾸만 피운다
나는 당신에게 몇분의 기억이 될 수 있을지
당신이 읽는 책의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
당신이 울면서 했던 기도가 이루어졌을
세계에서 당신이 지을 환한 미소가
 
  강우근(1995-)의 근간 시집을 읽었다. 삶에 치이고, 시가 시시하고, 하던 관성으로 한달 가까이 붙들고 있었다. 그날 딸 퇴근을 기다리며 사무실 책상에서 시해설을 쓰기 시작했다. 시작만 했다. 오늘, 이틀이 지나고, 애초 글의 구상은 흩어졌다.
 
  소중한 일상이란 것을 다음날 기사에서 보았다. 어린 딸을, 아들을 등교시키는 엄마들, 아빠들, 짧은 이별 사진 컷들. 소중한 일상이란 사람 사이 일 같지만, 사람 사이를 매개하는 사물들이 못지 않게 역할을 한다. 가령, 촛불(양초)이 있다. 요즘 촛불을 누가 쓸까 싶어도 촛불이 각별한 것을 누구나 안다. 인용한 시는 그 촛불 시점이다. 시인이나 화자의 시점에는 익숙하다. 촛불 같은 사물 시점인 시가 드물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사물 시점이란 결국 사물을 통해 보는 인간의 심사 같은 것이라서, 시점이 다른 것일 뿐 오십보백보 인칭 시점보다 멀리 나가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촛불을 켜놓고 무엇을 하는가? 그 하나가 아마도 기도일 터이다. 기도가 소망하는 것은 대개 소중한 일상이다. ‘울면서 했던 당신의 기도가 이루어졌을 세계’라면 좋겠다. 그 세계를, ‘당신이 지을 환한 미소’를 촛불 아래 볼 수 있다면, 촛불을 천개 만개 만만개 켜놓겠다. 촛불은, 시는 그걸 소망한다.
 
  나도 촛불이나 켜놓고 소망해야겠다. 12월 7일 저녁, 벌받을 놈 벌받게 해주소서.
 
(2024.12.5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