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되는 방법] - 안주철
혼자 밥을 먹어도 외롭지 않다. 식탐 때문에
혼자 밤늦게 산책을 해도 두렵지 않다.
미인이 쓰러져 뒹구는 술집 근처에 살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말할 사람도 없고
애써 기억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친구를 만나도 심심하다. 친구는
사라진 일자리에 빠져 있고 나는
옆 테이블에 앉은 미인의 다리가 궁금해서
아내와 통화할 때도 할 말이 없다. 애인이라도
생겼다면 거짓말이라도 정성스럽게 할 텐데.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신기한 것이 하나도 없다.
사진을 몇 장 찍으며 나를 속인다.
혼자 밥을 먹으면 눈물이 난다. 식욕이 없어서
혼자 산책을 하면 외롭다. 상점이 모두 문을 닫아서
혼자 영화를 보면 구석에 가서 울고 싶다.
등이 갈라지면서 또 하나의 내가 기어나와
갈라진 등을 두드리며 나를 위로해줄 것 같아서
혼자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 집을 지나친다.
더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맛있는 걸 먹어도 즐겁지 않고 아름다운 곳에 가도 행복하지 않다면, 작은 일에도 설레는 마음의 운동이 없다면, 떨리거나 날아갈 것 같은 감정의 탄력이 줄어들었다면, 나는 웃고 있는 것 같은데 어디 아프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노인이 되었다는 신호가 아닐까. 아직 젊은 이 시의 화자도 제 마음에 벌써 노인이 와 살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말을 들어먹지 않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끔찍해지지 않고 치욕스러워지지 않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죽음도 자꾸 아는 체해올 텐데 그놈과 친해지는 노하우도 없다. 늙음이 감기 걸린 것 같고 죽음이 주사 맞듯이 잠깐 따끔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혼자 밥 먹기, 할 일 없기, 아무 때나 아프기, 기저귀 차기,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만나주지도 않는 걸 즐겁게 받아들이기. 젊은이는 모르는 이 새로운 몸, 새로운 말, 새로운 마음, 새로운 고독을 외국어 공부하듯 익혀야지. <김기택 시인, 경희사이버대 교수>
(以上 경향신문의 2016.6.6자 [경향시선] 칼럼 전문 인용임)
경향신문에서 일주일에 한 편 [경향시선]이 실린다. 한 필자가 적절한 시 한 편을 골라 소개하는 난이다. 근래 필자는 김기택 시인이다. 나는 그 난을 유심히 읽으며, 대개 좋은 시라고 동의하고 가끔 뜬금없는 시를 고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거의 근간 시들이 거기 소개되는 것은 좋은 선택이라 여긴다. 신문에, 손바닥만한 공간에, 시 원문에 반쯤을 할당하고 필자가 할 수 있는 말은 300여 글자 남짓이다. 트위터의 140자 제한보다야 여유롭겠지만, 필자가 시를 해설하기에는 그 제한은 커다란 장벽일 것이다. 그래서 거기 시 해설은 시의 느낌을 전달하는데 그치기 마련이다.
문제는 해설의 글자 제한이 없는 시집에 붙은 해설들 역시 대개 그 모양이라는 데 있다. 말하자면, 김기택 시인의 위 해설은 느낌을 전달하는 – 시의 내용을 해설하는 오늘날 시 해설의 전형인 것 같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형식미라고 하는데, 왜 시 해설은 내용이 어떻다는 얘기만 하고 있을까?
가령, 위 시를 읽어보면, 노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사람이 사는 동안 새로운 – 외로운 경험일 거라는 느낌 정도는 누구나 받을 수 있다. 독자로서 내가 궁금한 사안은 다른 데 있다. 나는 읽으면서 첫 문장부터 뭔가 매끄럽지 않은 것에 마음이 걸린다. “혼자 밥을 먹어도 외롭지 않다. 식탐 때문에”라는 그 문장은 상식에 닿지 않는다. ‘식탐 때문에 혼자 밥을 먹어도 외롭지 않다’라는 문장에서 원인과 결과를 도치시켰을까? 문장 구조상 논리는 서지만, ‘식탐 때문에 혼자 밥을 먹는다’는 상식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식탐 때문에’를 다음 문장에 붙여 읽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된다. 첫 연의 ‘때문에’ 세 번이 다 그렇게 앞 문장에 붙여 읽어야 하지만 내용에서 어색하다.
시는 네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연은 훨씬 그렇게 어색하고, 뒤로 갈수록 문장들은 점점 그럴 듯 해진다. 마지막 연 “(…) 집을 지나친다. / 더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에 이르러 문장은 상식적 논리에 닿는다.
시의 노림수는 무엇일까? 원인(a)이 결과(A)를 낳는 예상을 깨고, 문장은 결과(A)에 다른 원인(b)을 제시하는 셈이다. 그 어색함으로 시는 마치 ‘노인이 되는’ 어색함을 표현하고 있는지 모른다. 또는, 그저 원인과 결과를 무관하게 하여 ‘낯설게 하기’ 수법으로 어색함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그 서걱거리는 문장들이 ‘더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집을 지나친다’는 뜻밖이며 동시에 통속한 정서를 빛나게 만드는 문장의, 시의 기술 아닐까 싶다.
(2016.6.6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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