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생활이라는 생각』 (창비, 2015.9.25)
1.
은유란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轉用)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저/천병희 역, 『시학』, 124)
가장 소박한 은유이론은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다. 명사간 바꿔 쓰는 것(A= B)이 은유라는 정의는 오늘날 일반 상식이기도 하다. 현대 은유 이론은 이보다 훨씬 확장되어 있다.
은유의 본질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종류의 사물의 관점에서(in terms of)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G. 레이코프 저/노양진 나익주 옮김, 『삶으로서의 은유』, 24)
아리스토텔레스의 은유가 사물(A)을 사물(B)로 전용하는 것이라면, 레이코프가 정리한 현대 은유는 사물의 관점(a)을 관점(b)으로 전용하는 것이다. 그 개념의 차이로 인하여 현대 은유는 무한히 확장된다.
Time is Money. (A=B)
You are wasting my time. (a=b) (레이코프 위 책, 27 : A=B, a=b는 편의상 넣은 것)
레이코프가 설명하는 은유는, 우리에게 ‘은유적 개념’이 성립되면, 그로 인하여 우리가 무수한 은유적 표현을 활용한다는 주장이다. ‘시간은 돈이다(Time is Money)’는 일반적 은유(개념)이다. 그 개념으로 인하여 무수한 은유적 표현이 가능한데, ‘너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You are wasting my time)’가 한 사례이다. 이 문장에서 ‘낭비하다 (wasting)’를 은유의 보조관념(b)으로 읽는다. ‘시간은 돈’이라는 은유적 개념이 사람들간에 자리잡으면, 시간은 돈처럼 낭비되고(waste), 절약되며(save), 투자되는(invest) 등등 다양한 은유적 표현으로 활용된다.
This gadget will save you hours. (이 장치는 네 시간을 절약해 줄 것이다.)
I’ve invested a lot of time in her. (나는 그녀에게 많은 시간을 들였다.)
사물(A)을 사물(B)로 전용하는 것이라는 은유에서, 사물의 관점(a)을 관점(b)으로 전용하는 것이라는 은유로, 은유의 개념을 확장하는 그것은 시어가 아름다운 비결을 설명하는 좋은 수단을 제공한다.
2.
이현승 시인(2002년 등단)의 세 번째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은 표제 그대로 생활하는 가운데 ‘생각’이 들고 나는 것들을 차분히 적어 놓았다. 일상을 적어내는 시에 대상의 특별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시로 버티기 위해서 필요한 성분은 그 일상 이외에 따로 있어야 한다. 시인은 생활에서 ‘생각’을 시로 끌어들이기 위해, 때로 아이러니나 패러독스로 일상을 꼬집고 에피그램(경구)으로 깨달음을 가장한다. 시인이 생활에서 얻은 ‘생각’이라야 기껏해야 생활의 배면이나 이면의 어떤 속성들이다. 그것들이 문득 새로운 각성 같지만, 언어가 잘 치장해준 기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결국 시가 되는 언어가 따로 있는 셈이다. 그 따로 있는 언어를 부릴 줄 아는 이가 시인이다.
3.
[씽크홀] - 이현승
퇴근길에 보는 어둠은 거대한 동굴 같다.
불행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는 생각,
차도로 뛰어드는 아이처럼
단 한걸음이면 우리는 벌써 도착한다.
도로와 함께 내려앉은 차량의 탑승자도
별일 없이 이 구덩이를 통과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응 지금 거의 도착했어 어쩌면 휴대전화로
오분 뒤의 도착을 알리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갑을 놓고 와 돌아가는 짜증스러운 오분 탓에
누군가는 덧없이 덫을 피해갔는지도.
여름의 하교길 오후에 우리는 저수지로 뛰어들곤 했지만
물주름이 사라지면 산과 하늘이 깔리던 그 자리가
통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어느날
저수지의 봉인을 풀자 갇혀 있던 아이 하나가 끌려나왔다.
들어갈 때와 다른 얼굴이었다.
있던 것이 사라진 자리가 구멍이다.
다시 단단해진 거울 위, 산을 소금쟁이가 지우며 지나가고
어린 네가 물이 들어간 귀를 털면서 뜀뛰던 고갯마루에
지금은 스핑크스라는 술집이 들어서 있다. 거기서
퇴근길에 그대로 가라앉아버린 사람도 있고
이 골목을 소금쟁이처럼 지나간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삯이 있어야 한다.
이 수수께끼 같은 삶을 무슨 대가를 지불하며 건너고 있는 건지
가야 할 길은 멀고 남은 시간은 없다고 생각될 때의 목마름,
퇴근길에 보는 어둠은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 같다.
내가 들어갈 그 아가리를 보다가 나는 잠시 구멍이다.
씽크홀은 근간 뉴스나 인터넷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고(事故)이다. 어떤 씽크홀은 도로 복판을 뚫고 자동차를 여러 대 삼키기도 한다. 그런 싱크홀을 소재로 한 것이 인용한 시다. 시는 구조에서 정밀하고, 언어에서 아름답다. 6개 연을 두 개씩 나누어, 눈앞 싱크홀과 기억 속 저수지 사건과 그 둘로부터 얻은 ‘생각’을 잘 정돈하고 있다. 그 가운데 아름다운 언어를 꼽으라면, 단연 은유이다. 가령,
“물주름이 사라지면 산과 하늘이 깔리던 그 자리”
“다시 단단해진 거울 위, 산을 소금쟁이가 지우며 지나가고”
이런 은유적 개념을 설정할 수 있다. ‘물(호수)은 거울’이 그것이다. 물이 잔잔하면 많은 것들을 비출 수 있다. 파문이 일면 그것들을 다 지운다. ‘물은 거울’이라는 은유적 개념에서, 호수 표면에 산과 하늘이 ‘깔린다’거나 소금쟁이가 잔물결을 일으켜 산을 ‘지우며’ 간다거나 하는 은유적 표현이 성립한다.
시의 문장이 아름다운 비결 하나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은유적 개념을 활용하여 은유적 표현을 사용한다. 호수에 산과 하늘이 ‘깔린다’거나 소금쟁이가 산을 ‘지우며’ 간다거나 하는 용언의 전용이 그런 은유이다.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종류의 사물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한다’는 레이코프의 은유 정의는 은유의 확장이며, 동시에 시어의 비결이다.
(2016.6.3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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