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땅을 여는 꽃들』 (문학과지성사, 2014.9.30)
[수평선·7] - 김형영
일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는 날은
시퍼런 바다를 향해 소리쳤나니
파도는 겹겹이 달아나며
하늘에 대고 다 일러바쳤네.
허나 이제 핏대는커녕
후회할 여력도 나는 잃어
이 후미진 바닷가에 떠밀려 와서
멀뚱멀뚱 大자로 누워버렸네.
썰물이여, 썰물이여
이대로 누워 기다리면
하늘의 말씀 듣고 와서
한마디쯤 전해주겠느냐.
안 보이는 세상 한 조각이라도 실어 와
보여주겠느냐.
젊은 날 후회스런 일을 도모하지 않은 인생이 있을까? 모든 인생은 후회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일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는 날”은 젊은 날이다. 그런 날 소리치기 좋은 장소는 바닷가이다. “시퍼런 바다를 향해 소리쳤나니” 파도 소리에 묻혀 그렇게 젊은 날은 갔다. 그저 간 것이 아니다. “파도는 겹겹이 달아나며 / 하늘에 대고 다 일러바쳤네.”
화자는 이제 늙었다. 소리도 못 지르고 ‘핏대는커녕 후회할 여력도 나는 잃어’ 바닷가에 누운 늙은이다. 후미진 바닷가에 떠밀려 와서 하늘의 말씀 전해달라고, 안 보이는 세상 한 조각 보여달라고 기도나 하고 있다.
시는, 앞의 두 연으로 젊음을 반성하고, 뒤의 두 연으로 늙음과 그 이후를 소망하고 있다. 앞의 두 연은 짧고, 뒤의 두 연은 길다. 앞의 두 연은 강렬하고, 뒤의 두 연은 처량하다.
젊음은 죄가 되었고, 늙음은 신앙이 되었다. 그리하여 신앙은 누워 기다리는 벌이 되었다. 그럴 때 죄는 아름답고, 그 벌은 슬프다.
(2016.11.22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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