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 (문학동네시인선, 2016.4.5)
“자아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투사, 세계가 자아로 들어오는 것을 동화라고 한다. (…) 서정시는 동일시의 산물이며, 이때 세계는 주체의 모노드라마가 된다.” (권혁웅, 시론, 132)
[날씨] - 박시하
동산에서 휘파람
소리가 난다
입으로 후후
바람 부는 소리
입으로 구름이 되다가
비가 되다가
기어이 날씨가 되는 소리
후후 불다가
기어이 열이 났지
온 힘을 다해 웃었지
눈물을 다시 몸속으로 집어넣으면
뜨거워, 시원해?
푸른 동산 뒤에다
사이좋게 오줌을 눈다
쉬잇
두 줄기의 뜨거운 삶이랄까
두 줄의 문장이랄까
늙어버린 꽃잎 하나가
우리의 뜨겁고 축축해진 사이로
툭
떨어져
이렇게도 느릿하게
온 힘을 다하는
휘파람 소리
휘휘
세계에 산재한 것을 대상이라 한다. 서정시는, 대상으로 향하든 대상을 끌어들이든, 주체 밖에 있는 대상을 완전하게 그릴수록, 주체와 대상을 일치시킬수록, 주체와 대상 사이 숨은 의미를 찾아낼수록, 아름답게 읽힌다. 서정시의 원리는 그림과 비슷하다.
언덕이 있다고 할 때, 서정시는 언덕을 말로 그림 그린다.
[운장암] - 공광규
풀 비린내 푸릇푸릇한 젊은 스님은
법당 문 열어놓고 어디 가셨나
불러도
불러도
기척이 없다
매애
매애
풀언덕에서 염소가
자기가 잡아먹었다며
똥구멍으로 염주알을 내놓고 있다
언덕 위에 염소가 한 마리 있고, 풀 먹으며 연신 염주알 같은 똥을 싸대고 있는 풍경이 우습다. 우습고 또한 처량한데, 그 풍경 앞에 젊은 스님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연민과 해학이라는 이중화 수법으로 시는 빛난다. 이 시는 대상을 잘 그려낸, 대상에 포커스를 맞춘, 대상으로 인생을 알리는 그림이다.
박시하의 [날씨]는 그러한 서정시의 도법(圖法)을 따르지 않고 있다. 시가 그려내는 것은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수용하는 화자의 심상이다. 대상의 그림을 기대하면, 위 시는 오리무중 읽기 어려워진다. 난해를 다름으로 보아주는 게 현대시의 기벽(奇癖)이라면 기벽이다.
앞의 시 [날씨]는 동산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로 시작한다. 바람 소리는 휘파람 소리처럼 들리지만, 시가 그려내는 것은 동산에 바람 부는 풍경이 아니라 기억의 세계이다. 3연부터가 기억의 세계이다. 휘파람을 처음 부는 일은 어린 시절 쉽지 않은 경험이다. 후후 불다가 열도 나고 웃음도 난다. 웃다가 보면 눈물도 찔끔 난다. ‘눈물을 다시 몸속으로 집어넣으면 뜨거워, 시원해?’라고 할 때, 그 질문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푸른 동산 뒤에다 사이좋게 오줌을 눈다’라고 할 때, ‘사이좋게’는 누구와 그러한 것일까? 그것은 어린 시절 동무와 함께한 추억일 수 있다. 동산에 올라 휘파람 불고 오줌도 따라 누던 오래된 기억이 있을 수 있다. 다르게 읽으면, 시는 기억 속 나를 반추하는 것일 수 있다. 기억 속 나와 현재의 나는 동산에서 ‘사이좋게’ 오줌을 누고 눈다. ‘두 줄기 뜨거운 삶’은 기억 속 나의 삶이 하나이며, 현재의 나의 삶이 다른 하나이다. 기억 속 나와 현재의 나는 연속하지만 차이가 크다.
나는 나를 반쯤 비웠다.
지나간 나는
장밋빛 꿈을 얼굴에 바른다. (27)
기억 속 나는 아마도 사랑을 받는 ‘나’이다. 그 사랑의 기원이 무엇이든 (시집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시인의 할머니와 아빠이다), 시인은 사랑을 ‘사라지는 것’으로 그리움을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랑은 기억 속 나의 기억이다. 현재의 나는 기억 속 나의 사랑을 기억하는 나이다. 둘은 다르다. 기억 속 나는 사랑의 존재이고, 현재의 나는 사랑을 그리워하는 존재이다. ‘늙어버린 꽃잎 하나가 우리의 뜨겁고 축축해진 사이로 툭 떨어진다’는 그 말 속에 시간의 풍경이 있다.
휘휘. 휘파람 소리는 언덕의 바람 소리다. 시는 그 소리를 사랑과 그리움을 가르는 오줌 소리로 바꾼다. 쉬잇.
우리는 사랑 아니면 그리움의 존재일지 모른다.
(2016.11.29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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