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일 영화 『Collateral Beauty』를 보았다. 국내 개봉 때 『나는 사랑과 시간과 죽음을 만났다』라고 했다나. 원제목을 그냥 쓰자니 Collateral 단어가 어럽고, 번역하자니 쉽지 않았을 테고, 해서 내용을 요약한 제목을 지어낸 것이겠지만,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다.
Collateral 이란 '부수적, 2차적'이라는 뜻이다. 영화 속에서는 collateral beauty를 '삶의 고통이 주는 아름다움'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 위로의 말로 누군가 ‘Collateral Beauty’를 느껴보라고 권한다. 자식을 잃고 삶의 고통에 깊게 가라앉은 상태를 '아름답다'고 말한다고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위로는커녕 그런 말 함부로 했다가는 자식 잃은 어머니에게 따귀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도 그 말 ‘Collateral Beauty’는 의미심장하다.
그런 인식을 자기위안이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세상이, 사는 가운데 닥치는 고통이 우리를 아름답게 한다는 인식은 다분히 종교적이기도 하다. '제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죽음의 고통을 수용하는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Collateral Beauty’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진감래(苦盡甘來) 또한 ‘Collateral Beauty’를 강요하는 사회적 인식, 아니 신화적 보편인식일 수 있다. 왜 고통을 수용해야 하는가, 그걸 견뎌내는 걸 아름답다고 하는가 - 삶은 틀림없이 불공평하다. 살아있음의 값이 고통이라면 역설(逆說)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고통 속에서 버텨내는 걸 ‘Beauty’ 그 자체라고 하지 않고 ‘Collateral Beauty’ 라고 한 칸 낮추는 말은 거의 야속하기도 하다.
그 영화에서 ‘Collateral Beauty’는 아름다운 말이다. 살아있음에 값해야 한다면, 살아있음에 값하는 어떤 방식이 ‘Collateral Beauty’할 것이다. 방식은 사람마다 제각각 달라도, 어떤 방식이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아름다움은 그것이 최선일 때 온다.
그 영화가 추천할 만한 좋은 영화인지 확신이 안 선다 (이 말은 영화에 대한 나의 기호에 기초한다. 전혀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Collateral Beauty’를 깔끔하게 한국말로 번역하기는 어렵다. 영화제목으로 원제를 버리고 가제(假題)를 거는 일은 흥행과 연관되어 고심이 깊었을 터이다. 그래도 『나는 사랑과 시간과 죽음을 만났다』라는 선택을 고심 가운데 ‘Collateral Beauty’를 얻었다고 하기는 어렵겠다. 그냥, 원어제목을 다는 게 더 나았을 선택 같다.
(2017.5.16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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