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에는 내가 할 말이 없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정치적 평등에서, 사회적 평등으로, 지금은 모든 약자들의 권리로 3단계 업그레이드를 거쳐왔다고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몇 쪼가리 읽어 얻은 얄팍한 내 지식은 하찮고, 실천적 삶에서 나는 페미니즘에 한참 위배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아마도 그런 관성으로 살아갈 것 같다. 나의 마초적 태도로 인하여 곤란을 받는 아내와 가족과 혹시 있을 내 주변의 약자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근래 강신주인가 하는 철학자가 ‘페미니즘은 수준 떨어진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았다. 그는 페미니즘 철학이 철학이랄 것도 없는 수준이라는 철학자로서 고명한 의견을 표현한 것 같은데, 그 역시 나와 비슷한 반페미니스트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은, 나와 같은 마초들이 반성하지 않고 무엇보다 실천하지 않으려면, 그 민감한 자장에 본의 아니게라도 얽히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 이외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 얽히지 않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지 모른다. 제 언어 속에 은근히 깔린 본성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한국일보의 황수현 기자가 쓴 칼럼 [한국 문단과 여혐]은 좋은 글이다. ‘시는 본질적으로 부적응의 언어다. 세계에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한 시인들은 세계 밖의 언어로 말한다.’는 말은 웬만한 기자가 갖기 어려운 시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시는 부적응의 언어이며, 시인들은 세계 밖의 언어로 말한다! 시와 시인들을 이만큼 상큼하게 정의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가 시에서 기대하는 게 바로 이것 아닌가? 시의 다름이란 현상일 뿐이다. 세계에 대한 부적응과 반발이 시의 본질이다, 어쩌면.
그의 글이 좋은 이유는 또 있다. 문단 내 성차별에 관한 부분이다. 그는 시인들 가운데 개새끼가 많다는 현상을 고발한다. 개새끼 같은 시인들은 페미니즘이 여전히 싸우는 바로 그들이며, 그 현상들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태도는 시의 본질에 위배된다.
내가 보는 시사점이 여기 있다. 페미니즘은 유행이 아니라 굴곡은 있으나 역사적 흐름이다. 그걸 잘 몰라서 실수할 수 있고, 그걸 알아도 일상에서 실천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핵심이란, 존중 혹은 반성, 어떤 상식적인 태도이다. 그 핵심을 잃을 때, 성주군수 같은 개소리를 하게 된다. ‘여자들이 정신 나갔어. 술집, 다방 하는 것들’(오마이뉴스, 16.09.13 기사 중)이라고 사드 배치 철회를 요구하는 주민들을 향한 성주군수의 발언은 직업의 귀천, 부의 무게에 따른 신(新)신분주의의 역겨운 태도 이상이다. 그 말은 페미니즘이 분노해야 하는 망언을 넘는다.
페미니즘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상식의 영역과 많이 겹치기 때문이다. 그걸 공부하지 않더라도, 실천하지 않더라도 개소리 하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아마도 있다. 그게 나 같은 마초들이 찾아야 하는 어떤 핵심이다. 세상에 대한, 사람에 대한 어떤 태도이다.
나로 인하여 자주 고통 받는 아내에게, 가족에게, 혹시 있을지 모르는 약자들에게 반성한다. 마초가 아닐 것을 약속은 못 하지만, 살면서 어떤 핵심을 잊지 않을 것은 약속한다.
(2016.9.16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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