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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구토와 구타, 한가한 해석

세계를 구토로 체험하는 자가 있고 세계를 구타로
체험하는 자도 있소 댁은
어떻소, 구토요?
구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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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희 시 [녹취 A-22] 중에서, 『창작과 비평, 2022 봄호』

  창비 2022 봄호를 읽다가 김언희(1953-) 시를 보았다. 나이 많은 이 시인은 워낙 끼가 남다르다. 그의 내숭 안 부리는 통쾌한 언어를 위 시에서도 볼 수 있다. 구토에서 구타로, 말놀이 같지만, 그 차이는 무척 의미심장하다. '구토'는 거의 문학적인 클리셰이다. 인간이 비위 상할 때 구토하는 것처럼, 시나 소설에서 '구토'는 제 정신을 비워내는 제스처이다. '구타'는 하는 놈과 당하는 놈이 좀 결이 다를 것인데, 폭력적 세계 내지 그런 삶을 의미하겠다. '구토'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충격에 대한 반응이고, '구타'는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폭력이다. 둘은 아주 다른 세계 혹은 반대의 경험일 터이다. 이를테면, 푸틴의 구타 - 폭력과 그걸 감각하는 우크라이나인의 구토, 이렇게 구분할 수도 있겠다.

  김언희 시인의 그 시는 범성애자가 이성애자가 주류인 정상(?)세계의 비정상을 비꼬는 내용이다. 그건 시인의 의도이고, 인용한 구절에서 무엇을 읽든, 그건 독자의 자유이다.

 

(2022.3.18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