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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7

증언과 부언 – 황지우 [만수산 드렁칡·1]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32, 1989 17)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한 사람 고르라면 나는 서슴없이 이상(1910-1937)을 꼽는다. 둘을 고르라면 황지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상이나 황지우나, 내게 공통점은 이름하여 모더니즘에 있다. 이상의 모더니즘은모더니티가 부재한 상황에서 추구한 모더니즘이고, 황지우의 모더니즘은모더니티가만개한 시대의 산물” (이철송, 『황지우와 박노해, 증상과 욕망의 시학』, 17) 이라는 시각도 있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이상, [오감도(烏瞰圖)] 작자의 말) 라고, 오감도 연작의 신문 게재를 중단하면서 이상이 내뱉은 한탄은 바로 모더니티 없는 시대를 살던 모터니스트의 절망인 셈이다. 그로부터 50년을 비약하여 모더니티에 도달한 사회에서 황지우는 다른 이유로 절망한다.

 

이상과 황지우는 모더니즘 말고도 내게 다른 공통점이 있다. 이상의 언어는 묘기에 가깝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이상에게서 시어의 아름다움을 처음 읽은 셈이다. 가령, ‘문을 암만 잡아당겨도 안 열리는 것은 안에 生活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상, [家政] 앞 부분) 라는 문장에서 나는생활이라는 절묘한 언어선택에 감동했다. 대학 시절 나는 황지우에게서 시어의 아름다움을 다시 읽었다. 그 시절 내게 황지우는 이상의 현현(顯現)이었다. 지금 황지우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부끄럽다. 황지우는 내가 못 본 것을 감추고 있었다.

 

[만수산 드렁칡·1]          - 황지우

 

오 亡國은 아름답습니다 人間世 뒤뜰 가득히 풀과 꽃이 찾아오는데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야유회 갔습니다 우리 세상은 국경에서 끝났고 다만 우리들의 털 없는 흉곽에 어욱새풀잎의 목메인 울음 소리 들리는 저 길림성 봉천 하늘 아래 풀과 꽃이 몹시 아름다운 彩色으로 물을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른 체했습니다 우리는 不眠의 잠을 잤습니다 지친 사람들은 꿈을 꾸고 凶夢의 별똥들이 폭죽 쏘는 太平聖代 국경 근처 다른 나라의 방언을 방청한 풀과 꽃이 자꾸 어떤 信號를 보내 왔습니다 그 신호의 푸른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며 우리 허리에 걸친 기압골이 南端으로 내려갔습니다

 

황지우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뒤에 붙은 해설에서 비평가 김현은 짐짓 딴청만 부린다. “황지우의 시는 그가 매일 보고, 듣는 사실들, 그리고 만나서 토론하고 헤어지는 사람들에 대한 시적 보고서(혹은 보고서적 시)이다.” 김현의 해설은 내가 읽은 김현의 비평 가운데 가장 비겁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 해설에는 황지우 시집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자기검열이 분명한데, 황지우 시집이 1983년 처음 출간된 것을 감안하면, 5공화국 엄혹한 시절을 살아내던 지식인의 비애로 읽어야 할 것 같다. 황지우 시집은 한가한 듯 보고 듣고 만나서 토론하고 헤어지는 사람들에 대한 시적 보고서가 아니다. 그 시집은 1980 5월 그 이후 광주에 관련한 시적 증언이라고 해야 한다.

 

위 시에서망국 1980 5월 광주이며, 그 시절 광주를 처참하게 만든 대한민국이다.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야유회 갔습니다라는 말은 격리된 광주 밖에서 일상을 태평하게 보내는 우리에 대한 힐난이다. 우리는 모른 체했다거나, 불면의 잠이나 잤다거나, 흉몽에 놀랐다거나 하는 언술들은 시인과 같은 몇몇 지식인의 비겁과 불안을 기술한다. ‘국경 근처 다른 나라의 방언을 방청한 풀과 꽃이 자꾸 어떤 신호를 보내 왔습니다라는 언술은 소문으로만 들리는 광주 관련 흉흉한 소식들을 비유한다. “제목만수산 드렁칡은 이방원 시조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철송 책, 74) 고려 충신 정몽주를 새 국가에 동참시키기 위하여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히지 않겠냐고 이방원은 회유한다. 정몽주가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히지 않았듯이, 시인은, 그가 말하는우리는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히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황지우는 5.18을 망국이라 말한다. 망국만 있고 신국(新國)을 그 시절 볼 수 없었다.

 

황지우의 모더니즘은 또 다른 절망을 노래한다. 그것은 모더니티 없는 사회에서 모더니스트가 앞서 나간 절망과 다르다. 황지우는 이 땅에서 모더니티의 파행을, 민주주의의 반동을, 억압의 재생을, 한 인간으로서, 한낱 시인으로서, 한갓 시집으로써, 어떻게든 증언한다. 시적 보고서가 아니라, 황지우는 시적 증언을 한다. 그 증언을 그 시절 나는 못 읽었고, 겨우 시어에 감탄했지만, 김현이 그걸 못 읽었을 리 없다. 김현은 다만 말하지 않았다. 그저시적 보고서’라고 비겁하였다.

 

(2017.7.26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