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495, 2017.3.6)
“젠더, 나이, 신체, 지위, 국적, 인종을 이유로 한 모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합니다.”
- 시집 뒤표지 글에서
우선 임솔아(1987-) 시인이 해시태그 ‘#문단내성폭력’ 관련 피해당사자인 걸 말할 필요가 있다. 그가 문지사와 출판계약서에 성폭력 관련 조항(가령, ‘갑(작가)이 을(출판사)의 구성원으로부터 성폭력, 성희롱 그 밖의 성적인 괴롭힘을 당한 경우 을은 행위자에 대해 해임이나 징계 또는 이에 준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을 넣었다는 기사가 있고, 그 계약 아래 출간된 첫 시집이고, 그 시집 뒤표지에 현대 페미니즘 구호를 내걸었고, 시집 어딘가 그가 얻은 삶의 상흔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은 시적 수사보다는 소설적 플롯에 더 강하다. 산은 산이듯, 시는 시다. 그의 시에 리듬이 살고, 역시 비유가 비춘다. 그 희미함이 그의 특징일 뿐이다.
[승강장] - 임솔아
어디 아프냐고 누군가 물었다. 아이는 빨간 신 한 짝을 잃어버려서 찾아다니다가 집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너무 큰 바지를 입은 것처럼 아이는
흘러내리는 기억을 추스르려 애쓴다.
신이 나를 잃어버릴 때마다 내가 도착하곤 했던 종점의 오디나무가 떠올랐다. 떨어진 오디를 주워 들고서 오디처럼 빨간 것들에 잇자국을 남겼던.
아이는 승강장 바닥을 빨개진
맨발로 걷고 있다.
아이를 데리고 유실물 보관소에 갔지만 주인을 잃어버린 열쇠와 가방 들이 있었지만 신은 없었다.
신을 꼭 찾아야 해요.
승객들이 내리고 지하철의 불이 꺼질 때 아이는 지하철로 걸어 들어갔다. 빨간 아이를 담은 채 검은 지하철은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노선으로 출발했다.
신도 인간을 이렇게 계속 찾아다닐 것이다. 그래서 집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아프냐고 물어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잃어버렸을 뿐 유실물 보관소의 물건들은 누구도 버린 적이 없었다.
위 시에는 하나의 사건과 하나의 상념이 겹친다. 사건이란, 빨간 신 한 짝을 지하철에서 잃어버린 아이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화자는 아이를 유실물 보관소에 데리고 가고, 아이는 집을 잃어버렸다고도 한다. 화자는 아이만큼 혼란한 경험이 있다. 화자가 모르는 아이에게 베푸는 호의는 제가 겪은 곤란과 겹친다. 아이에 대한, 저 자신에 대한, 결국 시는 삶에 대한 연민을 엿보인다.
위 시에는 그의 시에 드문 시적 수사가 빛난다. ‘너무 큰 바지를 입은 것처럼 아이는 흘러내리는 기억을 추스르려 애쓴다’는 서술은 은유이다. ‘기억=바지’가 되어 기억은 너무 큰 바지처럼 흘러내린다. ‘신을 잃어버릴 때마다’는 신(발)과 신(god)의 동음이의어(pun)고, 삶의 상처를 뜻하는 환유이다. 빨간 신, 빨간 오디, 빨개진 맨발, 빨간 아이 등의 빨간 색깔은 잃은 무엇을, 그 상처를 상징한다. 위 시를 가만히 읽어보면, 리듬을 타게 된다. 시의 리듬은 절제된 언어가 보여주는 힘이고, 단어나 구문 혹은 구성의 반복에서 나오는 흐름이다. 시에 리듬이 있다는 것은 결국 절제되고 구성된, 시의 형식을 이루었다는 증명이 된다.
위 시에는 시인의 세계관이 엿보인다. “신도 인간을 이렇게 계속 찾아다닐 것이다.” 신도 아이처럼 신을 잃고 인간을 잃고 집을 잃었을 것 같다. “잃어버렸을 뿐 유실물 보관소의 물건은 누구도 버린 적이 없었다.” 결국, 잃어버린 것은 신이고, 신의 실종 아래 인간은 인간끼리 서로 보듬고 살 일이라고 시는 넌지시 말하는 것 같다.
신을 잃고, 인간과 그 삶을 연민한다. 젠더, 나이, 신체, 지위, 국적, 인종을 이유로 한 모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2017.7.13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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