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문학동네시인선 103, 2018.3.31)
연필 - 홍일표
묻는다
오래 숨죽여 가늘게 이어지는 검은 울음이냐고
화석처럼 단단한 눈물이 반짝이는 밤의 골목이냐고
연필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귀기울여보면
고독사라는 말이 까맣게 타고 있다
무연고 묘지 같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흰 종이 위에
혼령처럼 연필 향내가 남았다
일생이 한 가지 색으로 이어진다
푸른색도 붉은색도 아닌
아니 모든 색을 다 삼켜버린
목관 속에 웅크리고 있던 그가 또박또박 걸어나온다
컥컥 목이 막혀 할말을 잃는
툭툭 부러져 동서남북 갈 길을 놓치기도 하는
울음 끝이 날카로운
심야를 걷는 연필심
고개 들어 창밖 먼 곳을 본다
혼자 걸어가는
밤비가 멈추지 않는다
홍일표 (1958-) 시인의 근간 시집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를 읽는 일은 혼란스러운 경험이 되기 쉽다. 많은 시들이 대상에 집중하고 있지만, 대상과 화자의 거리가 가까운 것도 있고 먼 것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은 쉽게 읽히고 다른 것들은 어렵게 읽히기 때문이다. 서정시처럼 읽히고 또한 실험시처럼 읽히는 그런 이중성이 그 시집에 있기 때문이다.
통상 서정시는 대상과 화자의 거리가 가깝다. 이를테면 물아일체(物我一體)가 서정시의 원리라고 한다면, 인용한 시 [연필]은 이번 시집에서 가장 서정시일 터이다.
연필을 쥔 화자가 있다. 화자는 연필로 시를 쓰고 있다. 검은 연필심으로 쓰는 시는 고독사한 한 사내에 관한 것이다. “오래 숨죽여 가늘게 이어지는 검은 울음”이나 “화석처럼 단단한 눈물이 반짝이는 밤의 골목”은 연필심으로 쓰는 문장의 형상이고, 또한 그 문장이 담고 있는 내용이다. 그 문장은 검은 연필심으로 쓰여지는 고독사한 사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검은 연필심과 고독사한 사내는 그렇게 물아일체가 되어간다. 그 둘은 대상이다. 이 시의 특징은 대상 간에 일체를 만들고, 또한 화자를 개입시켜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만든다는 데 있다. ‘울음 끝이 날카로운 심야를 걷는 연필심’ 같은 문장을 쓰면서 화자는 그 사내에 깊이 공감한다.
‘흰 종이 위에 혼령처럼 연필 향내가 남았다’는 고독사한 사내를 은유한다. 연필 향내가 희미하듯이 고독사한 사내가 혼령처럼 느껴진다. “일생이 한 가지 색으로 이어진다”는 연필심과 쓰여진 문장과 또한 그 사내를 은유한다. 그의 일생은 “푸른색도 붉은색도 아닌” 모든 색이 합해진 한 가지 검은색으로 기록된다.
홍일표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많은 죽음들이 산재해 있다. 고독사한 사내와 죽은 다섯 살 아이([뿔])가 있고, 세월호 희생([조문(弔問)]과 투신한 가장([몰운대에 서다])이 있고, 늙은 학자의 죽음([오역])과 가수 요조 동생의 사고사([가수 요조])가 있고, 팔레스타인의 횡사([감자가 있어요])와 자결한 독립투사([북촌])가 있다. 시집에서, 세상처럼 죽음은 전방위적이다. 표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에서 ‘노래’를 죽은 자의 목소리라고 읽어낼 수 있다. 이번 시집은 죽은 자의 목소리 – 노래를 채록한다. 그러나, 세상에 산재한 죽음은 고독사한 사내를 추모하듯이 매우 사적이거나 내밀하다. 죽음에서 고독 내지 무상(無常)을 읽어낼 때, 또한 그것이 서정시의 뚜렷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답지만, 허무한 그것들에서 서정을 읽고, 홍일표 시집의 한쪽을 읽는다. 그것들은 노래이다.
(2018.5.10 진후영)
'시시한 이야기 2018'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을 캐는 두 가지 길 – 최두석, 개별꽃 (0) | 2018.06.01 |
---|---|
소통론1 – 홍일표, 눈썹 (0) | 2018.05.15 |
시인 혹은 비평가의 정치 – 진은영, 노을 (1) | 2018.04.20 |
연서인가 아닌가 – 진은영, 시인의 사랑 (0) | 2018.04.12 |
새로운 서정은 위험하다 – 이원, 검은 홍합 (0) | 2018.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