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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8

소통론1 – 홍일표, 눈썹

시집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문학동네시인선 103, 2018.3.31)



소통에서 교환되는 것은 의견이다. 의견(doxa)은 상식에 기반하며, 발화자나 수신자 모두에게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공통의 지식을 말한다. 따라서 소통에서 교환되는 것은 발화자와 수신자 모두가 아는 것혹은 모두에게 알려진 것이다.”

(권혁웅, 『입술에 묻은 이름』, 23)

 

눈썹          - 홍일표

 

눈썹은 가볍고 여린 들창 같은 것

그렇게 말하면 어디선가 혼자 비 맞고 있는

눈물방울 같은 아이

 

차라리 가시철조망이라고 하자

철조망의 이데올로기라고 하자

 

눈썹 아래 잠드는 밤바다

격랑과 해일이 잦아든 사이 낡은 구두를 덜거덕거리며 심해를 걷는 사람이 있다

어디서 온지도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우우 떼지어 몰려다니는 슬픔의 군단이 있다

어군탐지기에 잡히지 않는

글썽이는 방향이 있다

 

무작정 찾아든 바닷가 민박집

다 잊고 죽은 듯 잠만 잔

관 속의 사나흘

긴 눈썹 아래 오래 젖어 뒤척이던 날

 

해안가 가시철조망을 바다의 눈썹이라고 부르며 걷던 저녁이 있다

가늘게 흐느끼는 모래알의 아득한 울음 끝

눈물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주던

몸안에서 돋아난 여러 올의 빗살무늬

 

눈썹은 때론 광물성

생의 지각을 뚫고 나온 한 마리 그리마처럼

 

대체적으로 한국 현대시가 난해해지고 있다는 데 이론은 없는 것 같다. 시인들이 난해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리 없다. 그렇더라도, 현대 시인들이 소통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난해를 꺼려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난해의 책임은 독자들 독해의 빈곤에 있기보다 시인들의 성향 탓이 크다.

 

위 인용된 책에서 시인이자 비평가인 권혁웅은 소통의 반의어는 불통이 아니라 진리일 수도 있다” (같은 책, 25) 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소통에서 교환되는 것은 의견이다라는 명제가 참일 때만 성립한다. 여기서 의견이란 진리와 거리가 먼, ‘상식에 기반하며, 발화자나 수신자 모두에게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공통의 지식’, 이름하여 불완전한 지식이라고 한다. 소통이 대개 상식의 반복일 뿐, 소통을 통하여 누구도 진리에 닿을 기대를 하지는 않을 것도 같다. 그런데, 소통이 단지 의견 교환일까? 의견이 정말 진리와 무관할까? 비슷한 두 사람이 소통할 때 소통은 의견 교환일 수 있다. 소통이 만약 문학과 독자의 사이일 때, 그것은 의견 교환이 아닐 수 있다. 소통이 만약 스승과 제자의 사이일 때, 그것도 의견 교환이 아닐 수 있다. 교훈이든 카타르시스든 재미든 문학에서 얻는 것은 의견 교환을 넘어 선다. 스승에게 크고 작은 학()을 얻는 것 역시 의견 교환을 넘어 선다. 소통을 의견 교환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좁은 정의이다. 사람간 일상적 의사 소통은 그 모양일 수 있어도, 소통은 의견 교환이면서, 감흥이면서, 각성일 수 있다. 소통을 무시하는 것은 일상을 문학으로 잘못 확장한 오류 같다.

 

권혁웅이 난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시가 소통에 기울 수 없는 불가피를 역설한다. 소통은 관습화의 함정을 피해가기 어렵고, ‘시적 언어의 특질이 훼손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책, 33) 시가 소통된다는 것, 바꿔 말하면, 직관적으로 이해가 쉽다는 것은 나의 상식을 확인할 때인 것도 같다. 직관과 상식이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직관이 상투적인 시를 상투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깨달음의 방법에 돈오점수가 있다고 하는데, 돈오는 직관과 가깝지 않을까? 직관에 상투성을 넘는 가능태는 없을까? 소통, 즉 직관적 이해가 쉬운 시가 상식을 기반으로 한다는 주장 역시 좁은 정의의 함정에 빠진 것 같다.

 

비평가들의 이론은 장황하다. 그들 이론에는 근거로써 선임 연구 자료나 유명 학자를 인용하여 제 이론을 윤색한다. 그것이 학문의 방법인 것에는 틀림없지만, 그들 이론의 골격만 추려보면 허점은 있기 마련이다. ‘모든 인간은 합리적이다는 희망적 가정에서 출발해도 경제이론이 현실에 적용가능한 것처럼, ‘소통은 의견이고 상식의 소통이다이라는 가정에서 난해시를 변호해도 시론은 가능하다. 그것은 경제현상이 복잡한 것처럼 현대시 역시 다면적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얻기 위해 시를 읽지는 않는다. 시는 예술이고, 예술은 잉여이다. 오히려 잉여에서 얻는 것은 아름다움이 더 크다. 아름다움은 재미의 영역이다. 소통이 어려울수록 재미없는 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난해는 현대시가 극복해야 하는 장애이다.

 

홍일표의 [눈썹]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식에 반()하지도 않는다. 쉽게 읽히지 않는 이유 하나는 눈썹을 대상으로 하지만 다중 은유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 눈썹은 눈의 들창이고, 눈물 흘리는 눈을 감싸주는 눈물의 어깨에 돋아난 여러 올의 빗살무늬이다. 눈썹은 해안가 가시철조망이다. 그리하여 가시철조망인 바다의 눈썹아래 바닷물은 눈물방울을 모은 눈물의 은유가 된다. 눈물을 모아 마치 바다를 이룬 커다란 슬픔이 거기 있다. 바다 물결은 떼 지어 몰려다니는 슬픔의 군단이고, 바닷물 아래는 어군탐지기에 잡히지 않는 글썽이는 방향이 있다. 바닷가에 한 사내가 있다바다는 사내가 눈썹으로 감싸는 눈물이다. 그는 눈물방울 같은 아이’를 바다에 잃었나 보사내의 눈썹 아래 눈물과 가시철조망 아래 바닷물은 은유이다. 상식적 과장이다.

 

시에서 슬픔의 규모를 느끼는 것은 카타르시스이다. 대상에 집중하여, 눈썹이 눈물의 어깨를 감싸는 빗살무늬가 되었다가, 바다를 품는 해안가 가시철조망이 되었다가, 한 마리 그리마(지네 비슷한, 느닷없는 출현에 놀라게 하는 벌레)가 되는 다중 구조는 재미이다. 시가 진리에 무관해도 카타르시스나 묘한 재미(비록 슬프더라도)를 만들 때, 충분하다. 아름답다.

 

(2018.5.15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