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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8

금을 캐는 두 가지 길 – 최두석, 개별꽃

시집 『숨살이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505, 2018.1.15

 

  “‘의 이름으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는 야금술의 길이 있고, ‘시 아닌 것들을 긁어모아 가 될 때까지 밀고 나가는 연금술의 길이 있다.”

-    신형철 [황병승론] : 권혁웅, 『입술에 묻은 이름』, 95 재인용

 

개별꽃          - 최두석

 

숲 그늘이 짙어지기 전

봄맞이하듯 피는 풀꽃이 있다

 

조촐하고 수수하지만

별을 우러르며 소망을 빌거나

별빛을 가슴에 품으며 그리움을 견딘 자

한 번쯤 무릎 꿇고

눈여겨볼 만한 꽃이다

 

원래 소망은 낮은 자리에서 조촐해야

마음의 그늘에 뿌리내려

꽃피울 수 있으므로.

 

  나이 먹기를 소망하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불안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기대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른을 동경하는 시선을 갖기 마련이다. 아이들에게 어른은, 제 부모이거나 선생이거나, 빨리 도달하고 싶은 완성된 이상처럼 보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제가 모르는 것을 다 아는, 제가 할 수 없는 것을 다 할 수 있는, 제가 갖고 싶은 것을 다 갖는 전능의 자리이다. 아이들은 자란다. 청소년이 되어서 중년의 성숙을 목격할 때, 그들 눈에는 아직 나이 듦을 동경하는 시선이 남아 있다. 중년은 지혜와 달관 내지 완성의 자리처럼 보인다. 그것이 착각인 것을 확인하기까지 제가 중년에 도달하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나이를 암만 먹어도 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삶은 끊임없이 불안하다. 중년의 자리에 도달해도, 그것은 제 기대와 다르다. 어린시절 바라보던 중년의 얼굴에 자리한 확고한 표정을 제 얼굴에서 확인하기는 어렵다. 어째서 제가 바라보던 중년과 제가 도달한 중년은 다른가. 어째서 끊임없이 불안한가.

 

  최두석(1955-) 시인이 근래 발표한 시집 『숨살이꽃』은 불안한 현대의 들판에 무심하게 피어난 들풀이다. 시인은 전국을 누비며 이곳저곳 핀 꽃이며 나무며 벌레며 폭포 등을 말로 채록한다. 그것들은 시의 형식이지만, 차라리 말로 쓴 도감(圖鑑)에 가깝다. [개별꽃]은 그 가운데 비교적 짧은 한 편이다. ‘한 번쯤 무릎 꿇고 눈여겨볼 만한 꽃이 있다는데, 그 시는 소망은 낮은 자리에서 조촐해야 꽃피울 수 있다는 전언이다. 시인은 소망 제 욕망을 다스리는 교훈을 풀꽃 한 송이에서 얻고 있다.

 

  불안의 원인이 욕망에 있는 것 같다. 바라는 곳과 현재하는 곳이 다르다. 바라는 곳으로 가는 길은 험난해 보이고, 갈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불안은 욕망과 현실의 차이, 미래의 불신에서 온다. 욕망의 규모가 클수록 불안은 커지기 마련이다.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그런데, 시인처럼 소망을 낮은 자리에서 조촐하게 줄여야 할까. 아예, 소망을 제거하면 해탈할 수 있을까.

 

  서두에 인용한 “‘의 이름으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는 야금술의 길이라는 게 이와 같다. 시적 태도만을 말한다면, 세상에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고 풀꽃을 찾아내는, ‘풀꽃에 제가 도달하고 싶은 얼굴을 겹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세계관이 있다. 야금술이 그렇듯이 시 아닌 것들에서 를 솎아내는 태도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런 태도가 걸러낸 시의 순도에 있다.

 

  욕망을 줄이는 길이 있는 것도 같다. 그것은 종교의, 철학의, 예술의 오래된 길이기도 하다. 현대인에게 욕망을 줄이라는 조언이 유용할까. 당신과 나에게 어떤 욕망을 줄이라는 말은 대개 허언이다. 벌어야 할 돈을 벌지 말라거나, 원하는 것을 가지지 말라거나, 바라는 바를 바라지 말라거나 하는 제욕(制慾)은 지혜롭게 보이지만, 하나마나 한 허언이다. 당신과 나의 삶은 욕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욕망을 버리지 않는 한 아이들은 소망하는 중년에 도달할 수 없다. 아이들은 욕망의 무게를 모른다. 그리하여 중년의 삶 아니, 제 삶이 욕망에서 불안으로 내닫는 속성을 모른다. 다만 완성이 거기 있을 거라고 동경할 뿐이다. 시는 어린 아이와 다르다. ‘시 아닌 것들을 가 될 때까지 밀고 나가는 연금술의 길은 불가능의 길이다. 온갖 물질을 암만 문질러도 금에 도달하지 못하는 연금술의 길은 의 어려운 길일 터이다. 욕망을 줄이라는 말은 쉽다. 그런 시는 쉽다. 욕망을 줄여서 초라한 삶에 자족하는 일은 스스로를 기망하는 것일지 모른다. 자연에 지혜가 있는다는 가정을 제거하면서 현실을 거북하게 말하는 시가 있는 이유이다. 그것은 다른 길이만, 시를 통해서 섣부르게 삶을 구원하려 하지 않는다. 삶과 함께 시를 혼돈에 남긴다. 그것이 자연을 상처화’(신형철)하는 길이며, 현실의 길이다.

 

  최두석 시인이 자연에서 삶의 모범을 찾아내려는 것은 그의 의지이다. 언제나 자연은 그 자리에 있다. 그 자리를 보면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거나 가 될 때까지 밀고 나가는 두 갈래 길은 아주 다르다. 하지만, ‘는 야금술이나 연금술로 나뉘는 두 갈래 길 위에 따로 있기보다 어느 쪽이든 캐낸 금에 있을 것이다. 금은 빛난다. 빛나는 것이 금이다.

 

(2018.6.1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