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 창비시선 415, 2017.12.21
반지하 바다 - 박신규
빗소리는 늘 비릿했고
축축한 햇빛은 짧지만 아늑했다
밤늦게까지 함께 일하고 함께 가난해도 좋았다
한밤 인쇄소 소음과 두통을 벗어놓고
‘파주상회’ 지나 ‘헌책’과 ‘철물점’ 지나
비탈진 ‘물망초’ 홍등 건너
숨차는 목련주택 반지층
각시고둥 같은 여자와 살았다
맑은 가을날 소나기 듣는다고 쪽창을 닫을 때
까치발이 예뻤던 여자, 함박눈 내리는 밤엔
파도가 멀다고 썰물 때라고 했다
귀울음이 터질 때마다 라디오 백색소음을 높이고
사랑을 나누면 마른 가슴께에서
해조음이 흘렀다, 돌아가야 해 아무래도
바다를 버려서 고장난 거야, 쥐어뜯을 때마다
파리한 귓볼에 맺히는 핏방울
목련에 닿는 달빛 주파수가 너무 높다는 밤
우는 소리를 밀쳐내고 잠들면
수평선에 베인 꽃잎들 피를 뿌렸고
썰물에 떠가는 귀를 줍다가 깼을 때는
이미 사라진 그 여자, 들리지 않았다
맥주 양주 소주처럼 오래된 골목을 지나
한없이 절망이던 잉크통 냄새를 지나
소음도 침묵도 다 파본 난 스물아홉
수색역 지나 경의선에서 조금 더 밀려난 곳
거기 반지하 바닷가 빈방
그 여자가 남기고 간 것이 있었다
고막이 터질 만큼 커지는 적막,
검게 무른 목련꽃 귀바퀴에서
바다 냄새가 낭자했다
위 시를 통하여 박신규 시의, 어쩌면 서정시의 세 가지 특징을 꼽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여기 없는 것에 기반하는 향수의 정서가 첫 번째이다. ‘각시고둥 같은 여자’가 있었다. 그 말은 ‘각시’라는 명명에서 화자의 여자였으며, 바닷가를 터전으로 하는 ‘고둥’의 어감에서 출신을 담아낼 수 있는 비유이다. ‘백색소음’이라는 말이 있다. ‘비 오는 소리, 폭포수 소리, 파도치는 소리, 시냇물 소리, 나뭇가지 바람에 스치는 소리’처럼 자연음인 백색소음은 안정감을 느끼게 하고 적막감을 해소하게 한다고 한다. ‘각시고둥 같은 여자’가 ‘귀울음’, 즉 이명에 고통받는 이유가 파도소리, 그 백색소음이 없는 곳에서 곤궁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지금 여기 없는 것에 기반하는 공감의 정서가 두 번째이다. “바다를 버려서 고장난” 각시고둥 같은 여자는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고, 거기 반지하 바닷가 빈방은 남았지만, “고막이 터질 만큼 커지는 적막”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화자의 그 시절 심란(心亂)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내지만, 독자에게 또한 그 이명 아닌 이명에 공감하라 강제한다. 향수과 공감은 정서의 단면이다. 향수를 대체할 정서 현상은 무수히 많다. 어떤 정서 현상이든 공감으로 포섭하는 힘이 서정에 있고, 그것이 서정의 특징이자 방법일 터이다. 서정의 비유법이 남은 세 번째이다. “소음과 두통을 벗어놓고” 라는 말은 일터를 벗어난다는 환유이자 은유(소음은 두통)이다. “숨차는 목련주택” 역시 비탈진 언덕을 올라야 도달하는 가난한 살림방에 대한 은유이다. 대상에 화자의 심사를 넘기는 그러한 은유는 서정성의 매력을 높이는 기법이다.
근일 제15회 이육사문학상 시상식에서 허수경 시인이 수상소감으로 “시를 쓰는 즐거움과 삼엄함 속에서 몇 십 년을 살았습니다. 선생님, 선배님, 후배님 다들 잘 아시겠지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삶을 견디는 버거움과 그 삶을 시로 엮는 어려움 가운데 또한 ‘즐거움과 삼엄함’이 있을 것이다. 두 말의 함의에는 지적 유희가 숨어 있다. 아는 것은 즐거운 표면이고, 아는 것을 시로 만드는 일은 삼엄한 이면일 터이다. 즐거움과 삼엄함의 간격을 밟고, 시인은 때로 가깝고 혹은 멀리 간다.
위 시는 가깝게 읽힌다. 그 서정에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2018.7.30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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