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주세요』 (창비시선 416, 2017.11.3)
아일랜드식 사직서 - 이산
불길에 휩싸인 은신처를
어린 고라니 한마리가 홀린 듯 뒤돌아보고 섰습니다
어쩌다 이곳에 발을 담그게 되었던 걸까요
막무가내로 들이쳐 등줄기를 적시는 비
눈발들 소복하게 쌓였다 흩어지는
아침 일곱시 통근열차 환승의 날들
돌이켜보면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곳에서
이 모든 슬픔은 시작되었습니다
책상 위에 남겨진 은빛 열목어와 금낭화 화분을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다시 찾으러 간다는 말씀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쓸모없는 아름다움
결국 실패하게 되어 있는 것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철 지난 아까시 나무 아래서 편지를 씁니다
시도 시 나름이라 쉬운 것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기 마련이다. 무엇이든 시는 시인에게 산고(産苦)를 강제하겠지만, 특히 어려운 시는 독자를 곤란하게 한다. 시에 효용이 있을까? ‘왜 의(義)를 말하는데 이(利)를 묻습니까?’ 주유천하(周遊天下) 때 공자의 불만이 그러했던 것과 비슷하게, 시를 읽어서 효용을 얻겠다면 속될지 모른다. “쓸모없는 아름다움”이 바로 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김민정 시인의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문학동네시인선 084)에 앞서 쓰였지만, 두 말은 같은 듯 다르다. ‘쓸모없는 아름다움’은 아름답기는 하다는 가정이 있다. 시가 아름답기는 한가?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에는 아름다움과 쓸모없음이 모두 포부가 된다. 김민정 시인의 그 시집 그 표제시에는 ‘밋밋한 남성성을 오래 쓰다듬게 해서 물이 나오게도 하는 돌’이라는 언술이 있다. 그 시에서 ‘돌’은 경북 울진에서 주운 돌 - ‘남성’을 환유한다. 따라서 ‘밋밋한 남성성’을 쓰다듬으면 나오는 ‘물’이란 ‘쿠퍼액’(의학용어?)을 의미한다. 그것조차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시에 대한 시인의 도발에 틀림없다. 아름다운 것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그것조차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당돌함이 거기 있다.
누구나 사직서를 품는, 혹은 던진 경험이 있다. 위 시 [아일랜드식 사직서]는 시인이 던진 사직서이다. 어떤 직장에 던졌을까?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곳’, 홍길동을 패러디한 그곳은 억압의 체제를 뜻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삶은 그곳에 있다. ‘은빛 열목어와 금낭화 화분’은 생명을 환유하고, 그것들은 그곳에 남겨져야 산다. 삶은 그곳에 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시인은 ‘결국 실패하게 되어 있는 것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거’를 안다. ‘쓸모없는 아름다움’을 향하여, 삶에 결국 실패하더라도, 시인은 간다. ‘불길에 휩싸인 은신처’를 뒤돌아보는 ‘어린 고라니’는 시인을 의인한다. 시를 향하여, 시인은 간다. 그 사직서는 사직을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를 향하겠다는 이를테면 출사표이다.
이산(1966-)의 근간 시집 『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주세요』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그는 제 심상을 엮어내느라 대상을 혼합하여 혼란하고, 세상을 체감하기보다 제가 읽는 것들 – 가령, 책이나 TV나 노래듣기에서 얻은 모티프로 시를 삼느라 현장감을 주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 철학 내지 윤리적 각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오늘날 시가 주력하지 않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의 시를 읽는 일은 혼란과 기시감 없는 가운데 서서히 이해되는 시적 호사가 있다. 시의 효용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그것이다. 시가 주는 언어의 고급스러운 재미 – 그 이상은 오늘날 시가 짊어지기 어려운 월권이 된 것 같다.
(2018.6.20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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