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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9

시적 진술과 시적 자유 – 허수경, 푸른 들판에 살고 있는 푸른 작은 벌레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2016.9.28

 

시적 묘사는 근본적으로 언어를 회화적인 방향으로 가시화하고, 시적 진술은 독백의 양상으로 가청화한다.

- 오규원, 『현대시작법』, 147

 

푸른 들판에서 살고 있는 푸른 작은 벌레          - 허수경

 

바지에 묻어온 벌레를 털어내었다

언젠가 누군가를 이렇게 털어낸 적이 있었다

털리면서도 나의 바짓단을 누군가는 무작정 붙잡았다

나는 더 모질게 털어내었다

서늘하고 아팠다

벌레여 이 바지까지 온 네 삶은 외로웠나

이렇게 말하는 건 나, 중심적임을 안다네,

사라져가는 생물들이 쉬는 마지막 숨을

적어본 적이 없고

모든 살았던 것들의 눈동자 역사를

적어본 적도 나는 없었으므로

 

벌레가 떨어져나간 자책의 자리

오늘은 뭘 먹을까

흰밥에 붉은 기러기발 같은

무말랭이의 오후를 먹을까

내 바지에서 떨어져나간 날개 달린 벌레가

아직 날지 못할 때

내가 한사코 털어내던

그날의 발길을 잡던 당신과 한 상 같이 먹고 싶다

푸른 벌레가 점심 걱정을 하는 오후가 되어

들판이 점심 걱정을 하면서 푸르러지는 오후가 되어

벌레가 나를 벌레적으로 생각하며 푸르러지는 오후가 되어

 

1.

어떤 시는 쉽게 읽히고, 어떤 시는 어렵다. 시의 독해력이란 게 사람마다 천차만별 하겠지만, 누구의 독해력으로도 시는 쉽고 자주 어렵다. 문제의 상당은 독자에게 있고, 또한 시에도 책임이 크다. 시가 쉽게 읽히고 때론 어렵게 읽히는 이유를 한 가지 찾자면, 맨 위에 언급한 시적 묘사와 시적 진술이라는 언술 형식에 있다. 오규원 (1941-2007) 시인의 그 책, 『현대시작법』은 시론서(詩論書)가 아니라 제목 그대로 시작법(詩作法)을 다룬다. 그 책은 하나하나 세부 이론에 대입하여 습작시와 기성 시인의 시를 풍부하게 비교한다. 그 책을 따라 읽다보면, 뒤로 갈수록 습작시의 수준이 높아지고, 점점 기성 시에 견주어 지는 것 같은 느낌 또한 재미있다. 그 책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시적 묘사와 시적 진술에 대한 강조이다. 그 둘은 시가 어렵고 쉬운 저 먼 곳을 향한 자유의 갈래이다.

 

2.

허수경 (1964-2018) 시인은 지난 해(2018년) 위암으로 타계했다. 1987년 등단하여 두 권의 시집을 낸 뒤, 1992년 돌연 독일로 건너갔다고 한다.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고, 독일인 지도교수와 결혼했다고 한다. 독일행 이후 타계 때까지 그는 25년 넘게 한국에 부재한 한국 시인이었다. 오랜 시간 타국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는 즐거움과 삼엄함” (2018년 이육사문학상의 허수경 수상 소감에서)을 누리고 유지하는 일을 감당한 시인을 다른 시인들이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시인의 타계 소식에 김민정, 오은 시인 등이 트윗에 애도하고, 먼 나라로 문상하고 했었다. 무엇보다 그의 시를 더 읽을 수 없게 된 것을 시인들이 슬퍼했던 것 같다. 이번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그의 마지막 시집이 된 셈이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살았던 그를, 이제 기억하게 되었다.

 

허수경의 그 시집은 한참 읽어야 한다. 오규원이 말한 시적 진술에 훨씬 가까운 탓에 그의 시는 쉽게 의미의 자리를 밝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난해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제 마음의 자리를 교묘하게 얽힌 언어로 엮는다. 그의 언어의 대상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 뛴다. 포커스를 옮기는 여러 대상들 탓에 그의 시는 오리무중하다가 거기 연관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때, 다시 읽힌다. 그것은 시적 진술이 독백의 양상인 증거이다. 대상이 아닌 심상을 나열하는 이유로 그의 진술은 자주 어렵다. 몇몇 시가 그중 심상의 진술이 단출하여 쉽게 읽힌다. 그 한 편이 위에 인용한 시다.

 

위 시는 바지에 묻어온 벌레가 모티프이다. 화자는 벌레를 발견하고 털어낸다. 이것은 사실의 진술이다. 그것은 언젠가 누군가를 이렇게 털어낸 적이 있었다는 기억과 겹친다. 누군가 실제 바짓단을 붙잡았다는 신파극이 있었다기보다, 독일행을 결심하였을 때, 시인을 말리는 누군가 있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지인이든 부모든 누군가 시인의 결정을 몹시 아쉬워했을 터이다. ‘그날의 발길을 잡던 당신과 한 상 같이 먹고 싶다는 말은 그리하여 후회가 아니라 회한이다. 화자는 이제 그럴 수 없으리라. 화자가 자리한 곳은 너무 멀고, 당신이 더는 없을 수도 있다. ‘바지에 묻어온 벌레오늘은 뭘 먹을까’라는 일상적 사태 두 가지로 화자는 당신을, 당신을 향한 회한을 진술한다.

 

3.

시적 묘사는 언어를 회화적인 방향으로 가시화(可視化)하고, 시적 진술은 독백의 양상으로 가청화(可聽化) 한다는 오규원 시인의 명제는 너무 이론이다. 묘사가 가시(可視)의 그림일 수밖에 없더라도, 진술이 꼭 가청(可聽)의 음악을 지향한다는 대비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묘사가 대상에 집중한다면, 진술은 자유로운 심상에 날개를 단다. 묘사의 방향은 합일(合一)이고, 진술의 방향은 산일(散逸)이다. 묘사의 시가 대체로 읽기 쉽고, 진술의 시가 대체로 읽기 어려운 차이는 그런 시적 태도에 있다. 중심으로 몰아가는 시적 묘사는 쉽고, 어딘지 자유롭게 날아가는 시적 진술은 어렵다. 현대시가 어려운 이유는 묘사보다는 진술에 훨씬 기우는 경향 때문인 것 같다. 시적 진술은 대상에 집중해야 하는 제약을 벗는 시적 자유에 가깝다.

 

(2019.5.20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