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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9

천천히 읽히는 슬픔 – 유희경, 너의 사물

시집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문학과지성 시인선 508, 2018.5.2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19

 

 

너의 사물          - 유희경

 

너의 사물을, 놓인 그 위로

얼어붙은 지난 일들 사라져

흔적이 남게 될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나는, 너의 사물을 매만진다

 

그것은 책상이다

여기는 좁은 의자다

벽의 일부로 날아간 오후가

천천히 터져간다 왼편에 생긴

그쪽엔 창문을 두기로 한다

 

창밖엔 나무와 나무의,

차츰 자라는 날이 어둡구나

이틀간 내려놓은 비들의

지상과의 흐릿한 작별

지금은 네가 모의해 남긴

사물의 생업이다

너의 사물은 가난하고

너의 사물은 언제나,

너를 찾고 있다 부유하는 추적

운명은 서러이 놀란다 그렇게

너의 사물은, 웅크려 있다

 

슬픈 것일까 너의 사물은

그러니까

 

가령, 가령에서 시작해,

가령으로 끝나는 가장의

숨김 아래, 뚜껑이 닫은

너의 사물 그러니까,

가령, 지구는 자신의 그림자로,

덮인다 때로는 침묵에 의해,

달빛이 쏟아져 운다

 

생의 끝을 상자처럼 접는다

四肢는 그토록 끝나지 않는 태연

실은, 너의 사물이 넣어두고 잊어버린

 

1.

  다른 언어로, 즉 시를 새롭게 쓰는 일은 시인에게 무거운 숙제일 터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언어로 쓰인 시를 읽은 일 역시 독자에게 쉽지 않은 과제이다. 시로 올라선 언술은 충분히 절제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미 군더더기 없어야 하는 필요조건을 만족하면서, 다른 언어로 시를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울지 아는 이는 오직 시인 자신일지 모른다. 시인의 고민이 겨우 다른 언어에 한정될 리 없겠지만, 그가 다른 언어 때문이 날밤을 새운다고 해도 독자는 믿어야 한다. 독자 역시 시인의 다른 언어에 당혹하고, 그것을 시로 인정하면서, 가령 시집을 참고 읽는다. 시가 늘 익숙한 그 타령이라면,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아님, 시가 다른 언어로 쓰여 당혹하는 것이 좋을까?  답은 그 중간 어디쯤 있을 거라는 것은 뻔한 타협이다. 대개 진보란 극단을 밀고 나가는 진일보의 다음 순간에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비유가 없는 문장을 현대시의 한 추세라고 해도 그것은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단일한 대상에 초점도 없고 감정을 과잉하지 않는 시는 독자를 혼란하게 만든다. 다르다는 것, 낯설다는 것, 새롭다는 것은 예술의 욕망이다. 시인이 그러할 때, 독자 역시 억지로라도 거기 동반하는 도리밖에 없다. 지루한 것, 혼란한 것, 어렵다는 것은 독자의 비용이다. 새로운 것이 다 반짝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것 중에 반짝이는 것이 있다.

 

  유희경(1980-)의 시집을 읽는 일은 독자에게 다른 언어를 경험하는 사례가 될 터이다.

 

2.

  2014.4.16. 다시 4월이다. 올해가 세월호 5주기라고 한다.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이 문장은 전후(戰後) ‘황무지에 다시 꽃이 피는 순환이 무심하고, 잔인하다는 반어(反語)이다. 이 땅에는 4월을 잔인하게 만드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정치인 몇이 세월호 지겹다. 그만 좀 울겨먹으라고 비아냥 했다고 들을 때, 그들이 제 세력을 결집하고자 막말한다는 정치적 계산을 읽을 때, 세상에는 상식과 다른 흐름이 있다고 인정해야 할 때, 그런 게 점점 현실이라고 우려해야 할 때, 4월은 더욱 잔인한 달이 된다.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가 남는다. 연민에는 시한이 없어야 한다. 신형철은 세월호 사건이후 그런 세태의 한 켠을 참혹하다 말한다. 참혹하다는 말은 양날이다.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자와 유족과 슬픔을 공감하는 모든 심사에 참담하다는 연민이고, 또한 슬픔을 조롱하는 자들이 지나치게 한심하다는 비난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슬픔이고, 슬픔을 껴안는 연민이고, 슬픔에서 배울무엇이다.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같은 책, 27) 신형철은 지나치게 문학적이다. 그가 말하듯이, 슬픔을 잊지 않고, 슬픔에서 배울 것을 공부하는 게 옳다. 또한 슬픔의 조롱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년 4월에 그와 같은 조롱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국회의원 총선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날까지 그 참혹한 조롱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세상은 늘 분주하고 4월은 다시 잔인할 지 모른다. 여하튼 4월은 잔인한 달이다.

 

3.

  나는 시집을 두 번, 혹은 세 번 읽는다. 그렇게 인용 시 [너의 사물]을 거듭 읽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가, 두 번째 읽을 때 너의 사물이 세월호 희생 학생들의 유물을 말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책상의자가 단초이다. 그것들은 희생된 학생들을 연상시키는 사물이다. 이 시는 세월호 사건 이후 희생자를 남겨진 사물로 추모하는 내용이다. 그렇게 읽어보니까, ‘나는, 너의 사물을 매만진다는 화자의 행위가 문득 슬프다. 화자가 서 있는 곳은 너의 사물이 놓인 기억의 교실일 수 있다. ‘너의 사물은 언제나, 너를 찾고 있다는 담담한 문장도 슬픔을 충분히 증폭시킨다. 유희경 시가 대강 이와 같다. 비유를 탈색하고, 대상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일상에서 추린 몇 가지를 소소하게 문장으로 나열한다. 그런 문장들을 읽다 보면, 어느덧 슬픔의 수면이 가슴 높이까지 찬다.

 

  참을성 있는 독자는 읽고 또 읽는 중에 시를 다르게 읽을 수 있다. 유희경 시는 천천히 읽는 가운데 있다.

 

(2019.4.20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