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2016.9.28
온몸 도장 - 허수경
꽝!
그리고 온몸 도장
부딪힌 쪽이 더 선명하고 부딪칠 때 머리를 돌린 흔적까지 있는
유리창에 찍힌 새의 온몸 도장
새는 뇌진탕으로 추락했을까,
마당에 나가본다
없다, 새는. 고양이가 금방 다녀갔나
없다, 온몸 도장은 있다
없다, 유리창 이쪽과 저쪽 사이에는 제삼의 세계가 존재하나
그 세계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새는 온몸 도장을 찍었나
마당에 빛만 가득하다
빛 속으로 온몸 도장마저 끔찍하게 사라진다
유리창에는 내 그림자만
검은 온몸 도장 같은 내 그림자만
사라지자!
끔찍하게 저 도장 너머로
그런 다음 무얼 하지?
아직 마당엔
빛의 연기가 하얀데
빛의 향기만 멈추어 섰는데
새가 건물에 부딪치는 일은 흔한 불행이다. 큰 유리창, 아예 유리벽 건물에 새는 횡사한다. 원하는 것은 다 이룰 수 있는, 돈만 있다면, 얼마든 풍요로운 문명 곁에서 새가 나는 일도 위험하다. 벽이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경계라면, 그 경계에 둔 창은 안과 밖을 소통하게 하는 다른 문이다. 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간다. 창을 통하여 인간은 밖을 누린다. 풍경은 창의 크기만큼 편집된 세계, 이를테면 안식(眼識)인 셈이다. 유리벽은 창문을 벽 크기로, 편집된 격자 세계를 제한 없는 시야로 확장하지만, 유리벽 또한 벽이다. 그때 풍경은 안에서 살피는 밖이며, 언제든 공감할 수 있어도 체험하지 않는 영화(映畵) 속 한 장면, 미장센이다. 위험은 언제나 밖에 있다. 유리창 밖에 위험한 짐승이 하나 있고, 그것이 새다. 유리창에 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새나, 유리창을 통해 안과 밖을 내다보고 들여다보는 인간이나, 착시의 인과를 감당해야 한다.
화자는 유리창 이쪽에 있다. 새는 유리창 저쪽에 있다. 그 새가 유리창에 충돌한다. 그것은 유리창에 비친 가상을 실재로 착각한 새의 죽음일 터인데, 화자가 마당에 나가보았을 때 새는 없다. 온몸 도장만 유리창에 남아 있다. 새가 없다. “유리창 이쪽과 저쪽 사이에는 제삼의 세계가 존재하나”라는 진술은 이 시를 버티는 관념이다. 새는 밖에서 안으로 온몸 도장을 찍으며 날아들었다. 새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밖에도 없다. 그저 온몸 도장만 유리창에 찍혀 있다. 그 유리창에 “검은 온몸 도장 같은” 화자의 그림자가 또한 비친다. “사라지자! / 끔찍하게 저 온몸 도장 너머로”. 새가 사라진 것처럼 화자는 제 육신이 사라지는 것을 바란다. 새의 온몸 도장과 화자의 그림자가 같다면, 새가 유리창 이쪽과 저쪽 사이로 사라진 것처럼 화자 역시 이쪽과 저쪽 사이로 제 그림자만 남기고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다음 무얼 하지?" 화자는 알 수 없다. 저쪽 마당에는 빛이 환하다. 화자는 미련이 남는다. 이쪽과 저쪽 사이로 아직 사라질 수 없다.
이 시가 예감한 것은 아니겠지만, 시인은 몇 해 후 그렇게 사라졌다. 유리창의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던 관찰도 거두고, 저쪽에서 이쪽을 들여다보던 성찰도 그만두고, 시인은 그 사이 제삼의 세계로 갔다. 주인 없는 그림자도 사라졌다. 그가 있던 마당엔 빛의 연기가 하얗다. 빛의 향기만 멈추어 섰다. 그것들은 빛의 온몸 도장이다. 그것들이 시다.
(2019.5.31 진후영)
[사족]
밀교에서 사람이 죽으면 잠시 이승과 저승 사이를 머문다고 한다. 살아생전 수양의 근기에 따라 갈 곳이 정해지기까지 사자(死者)로써 머무는 최대한이 49일이라는 윤회관이 있다. 그 기간 사자를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려고 유족들은 축원을 한다. 49재는 거기서 유래한다. 이쪽과 저쪽 사이를 이렇게 밀교 교리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시인이 말하는 ‘유리창’ 이쪽과 저쪽은 그저 현실 세계의 안과 밖이라고 읽는 게 좋겠다. 그 ‘사이’는 죽음의 세계이다. 죽음의 본능이 있다고 하는데, 이 시를 그렇게 어둡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시는, 빛의 연기가 하얗고, 빛의 향기가 멈추는, 찬란한 현실의 마당을 긍정한다. 비록 그 빛의 세계는 혼돈하지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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