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사에서 ‘극서정시’란 명칭은 두번 출현했다. 첫번째는 1970년대의 ‘극서정시(劇抒情詩)’이고, 두번째는 2000년대의 ‘극서정시(極抒情詩)’이다 (…) 앞의 극서정시가 시쓰기의 타성에 저항하고자 했다면 뒤의 극서정시는 시쓰기의 혼란에 저항하고자 했다.”
- 김종훈 평론집 『시적인 것의 귀환』, P112
김종훈 평론집에서 인용한 극서정시라는 말은 생소할 수 있다. 한국어로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1970년대와 2000년대 두 시기에 각각 등장한 극서정시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시적 시도이다. 1970년대 극서정시(劇抒情詩)는 이전 시대 ‘참여’에 반(反)한 ‘순수’를 앞세우는 서정시의 “시쓰기에 대한 타성을 극복”하고자 인근 장르인 ‘극’의 미학에 초점을 두었다면, 2000년대 극서정시(極抒情詩)는 이름하여 ‘미래파’의 난해함과 난삽함에 대한 비판으로 “시쓰기의 혼란에 저항”하고자 했다. (이상, 김종훈 비평의 논지) 2000년대 극서정시(極抒情詩)는 아래 사례 하나면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꽃들은 왜 하늘을 향해 피는가
그리고 왜 지상에서 죽어가는가
- 김성규 [절망] 전문, 창비 2013, 김종훈 평론집에서 재인용
시인이 한 권의 시집을 출간하기까지 대개 수년이 걸린다. 그 수년을 모은 시들이 한 권의 시집에 게재될 때 어떤 성향을 보인다는 것은 시인이 그 기간 자기 시 세계를 이전과 다르게 기획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새 집을 지을 때 이전 집에서 부족을 메꾸고 삶의 변화를 수용하려는 시도는 당연하겠지만, 수년을 모은 시에 유사성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이고, 시집 간에 유의미한 차이를 만드는 일 역시 어려울 터이다.
윤성택 시인의 첫 시집 『리트머스』 (문학동네, 2006)에 이어 두 번째 시집 『감(感)에 관한 사담들』 (문학동네, 2013)을 연달아 읽어 보았다. 첫 시집이 짧은 문장 위주로 보다 비유적 구조를 많이 활용하였다면, 두 번째 시집은 비유에서 묘사로 문체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대개의 시가 은유 구조나 환유 구조를 기반하여 삶의 정서를 채색(彩色)하며 보여주려는 게 첫 시집이었다면, 묘사체로 기억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번갈아 감각하며 보여주려는 게 두 번째 시집이다. 그 차이가 큰 것도 있고 미세한 것도 있다. 시마다 편차야 있지만, 두 시집을 통하여 시인은 서정시의 핵심 미학의 하나인 비유는 물론 그 문체적 특징인 묘사까지 서정시의 형식적 기교를 두루 시현(示現)하는 셈이다.
윤성택 시가 극서정시(極抒情詩)에 동조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의 시는 극히 제한적인 2-4행 정도 극서정시의 양적 압축이나 정서의 질적 절제와 별로 관련이 없다. 그러나, 두 시집에서 하나는 비유 구조 위주로 다른 하나는 묘사 구조 위주로 시를 형성하였을 때, 그가 2000년대 시적 주류였던 ‘미래파’의 난맥(?)을 지양하는, 시쓰기의 기본을 회복하여 서정시를 지향하는 시적 성취를 달성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두 시집에서 비슷한 소재의 시를 비교하여 읽어보면, 비유와 묘사로 비슷한 듯 다르게 서정성을 요리한 미감을 맛볼 수 있다.
플라타너스 아래
그 버스정류장에는
가지 많은 플라타너스 한 그루
피아노 교습소 간판을 반쯤 가리고 서 있다
비 오는 날에는 그 아래에서
버스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우산을 향해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실은 플라타너스의 연주라는 것을,
빗물로 흠뻑 잎들을 조율하고
가지의 탄력으로 옥타브를 넘나들기도 하면서
비 오는 내내 잎과 가지를 흔들어
우산의 공명통을 두드리는 것이다
노선안내판 옆 줄지어 선
음표 같은 뒷모습, 키 높이에 따라
색색의 우산으로 화음을 이룬다
한여름 교습소 창문에 드리운
새 이파리들도 박자를 놓치지 않는다
어느새 버스는 악보처럼 넘겨지고
모두 돌아간 그 버스정류장
옹이 같은 귀를 열어둔 플라타너스만 적적하다
그러면 다시 누군가를 기다리며
보도블록에 척척 잎을 눌러보는 것이다
- 윤성택 첫 번째 시집 『리트머스』 문학동네 2006 수록
비 오는 날 우산 들고 나무 아래 서 있으면 빗방울이 드문드문 우산을 두드린다. 그저 우산에 바로 떨어지는 비와 다르게 나무 아래서 잎들에 맺혔다가 떨어지는 빗방울은 알이 굵어서 우산을 진동하고 소리도 크다. 마침 근처 피아노 교습소에서 음악이라도 새어 나온다면, 버스정류장에 여러 우산이 제각각 크기와 높이로 서 있다면, 우산들을 두드리는 빗방울은 화음을 이루는 음악이 되기도 할 것 같다. 그렇게 플라타너스 아래 ‘빗방울이 연주’한다는 은유 구조는 시 전체를 관통한다. 거기 서 있는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리고, 그들이 떠나면 빗속에서 플라타너스는 다시 누군가를 기다리며 보도블록에 제 잎을 떨어뜨려 우산 대신 울리지 않는 음악을 연주하려는 것도 같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에 음악이 붙는다는 것은 기다리는 일이 가슴 설레는 일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빗방울이 연주’라는 은유는 ‘기다리는 일이 가슴 설레는 일’이라는 숨은 은유가 되는 것도 같다.
푸른 음악
더 높아져야 한다 여기저기 벽을 향해서
피아노 소리가 좁은 골목을 나와
대문의 건반을 누르며 걸어간다
불 꺼진 보안등의 음계를 따라
은행잎 쏟아진 자전거 앞이나 금 간 벽 틈을 지나
두근두근 한 음씩 어두워진다
바람이 휘청휘청 걷고 있는 빨랫줄
막다른 곳에 이르러 도돌이표처럼 시작되는 계단이
둥근 무릎을 짚으며 첫 음을 이을 때
나무는 캄캄하게 매달아놓은 쉼표
담벼락 악보로 지은 음악은
화음이 풍부한 식물로부터 벽을 오른다
저녁마다 제 음으로 밝아오는 창문,
긴 손가락의 전신주가 손끝에 힘을 모은다
- 윤성택 두 번째 시집 『감(感)에 관한 사담들』 문학동네 2013 수록
좁은 골목을 지나가는데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그 음악은 골목에 울리면서 골목에 있는 온갖 사물들을 화음을 만드는 도구로, 음을 그려놓은 악보로 바꿔 놓는다. 대문은 건반이 되고, 보안등 불빛은 가깝고 먼 거리에 따라서 한 음씩 어두워진다. 계단은 도돌이표가 되어 음을 되돌리고, 나무는 쉼표 담벼락은 악보 식물은 화음 창문은 밝은 음, 마침내 연주자 전신주가 보인다. 언술되는 대상이 거진 의인(擬人)이고 은유지만, 이 시를 은유 구조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각각 은유는 음악 아래 제 역할을 하며 산개되어 있을 뿐이다. 어둠이 내리는 좁은 골목, 그때 들리는 푸른 음악, 그것을 듣는 화자, 그 화자의 감각을 통해 푸른 음악을 엿듣는 독자, 모두 그저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듣는 것 이외 기다림 같은 어떤 정서도 없다. 묘사한다는 제1원칙은 대상 그 자체 아닐까 싶다.
인용한 두 시의 차이는 미세하다. 비유를 읽든 묘사를 읽든 두 가지를 섞어서 읽든, 두 시는 시의 서정성에서 준수하다. 자기 시마다 차이를, 시집마다 간격을 만드는 시인이 있고, 그 차이를 읽을 때 거기서 아름다움과 지속과 변화를 동시에 느낀다. 시는 값지고 시인은 귀하다.
(2022.6.23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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