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을 가른 기준이 모호하고 뜻이 수상쩍기는 하지만 우리 시를 이해하는 데 쓸모 있는 큰 개념들이 있다. 리얼리즘 시, 모더니즘 시, 또는 순수 전통 서정시 등.”
- 김종훈 평론집, 『시적인 것의 귀환』, P332
리얼리즘 시란 송경동의 시처럼 “당대 공통 현실에 대한 관심”(김종훈)에 기운다. 소위 참여시가 그 전형이다. 그럴 때, 시인은 제 삶보다 더 큰 삶을 기꺼이 번민하려 하고, 시는 직설적 언어로 현실의 곤경을 재현하며 극복을 모색하는 계몽의 수단이 되기 쉽다. 리얼리즘 시는 삶의 올바름이나 행위의 정의로움을 강조한다.
검정 비닐봉지처럼 아이들이
이러저리 날린다 하루의 마지막 볕을
배급 받으러 나온 노인들도 어슬렁거린다
패딱지를 잃고 울던 아이가
제 엄마에게 질질 끌려간다
신작로에서 정복 차림의 어둠이 저벅저벅
걸어들어온다 침침해진 아이들 눈이
땅 쪽으로 더 기울어진다 그때마다
운동장에 조그만 무덤이 하나씩
새로 돋아난다 껴안아주고 싶지만
내 안엔 더 큰 어둠이 웅크리고 산다
밤하늘에 흰 핀을 꽂고
문상 나온 별들
- 송경동, [저녁 운동장]
모더니즘 시란 진은영의 시처럼 예술이 현실을 재현한다는 모방론에 거리를 두며 “말 그 자체에 대한 울림의 진폭”(김종훈)에 공을 들인다. 소위 순수시가 한 전형이다. 그럴 때, 시는 알지 못하면 읽을 수 없는 암호가 되거나 예측을 벗어나는 감각을 보여준다. 시인은 철학적 미학적 지식을 탐구하며, 시는 의미를 전달하는 소통 체계에서 벗어나거나 작품 자체로써 존재하기를 기도(企圖)하는 낯선 존재물이 되기도 한다.
하늘이 저기 있다
입은 채로 자신의 나일론 치마를 불태우는 여자처럼
벽에 걸린 그림 속에는 전나무의 녹색 바늘, 옥수수알의 노란빛이
눈을 찌르는 오후가 있다
불꽃, 너는
내부에 젖은 눈동자가 달린 동물 하나를 키우고 있다
- 진은영, [노을]
순수 전통 서정시란 이덕규의 시처럼 “둘레 세계에 대한 관심”(김종훈)에 충실한 시를 말한다. 통상 다수가 기대하는 시가 그것이다. ‘순수 전통 서정’시라는 세 겹의 한정은 중복되는 듯 어색한 수사지만, 자연을 모범으로 삼고 노래가 되며 정서를 순화하는 스타일이 곧 시라는 일반 기대에 부합한다. 그럴 때, 시인은 구도적 자세를 취하고, 시적 언어는 리듬과 비유로 치장하며, 시는 직관적으로 이해가 쉽다. 시적 대상을 통한 발견은 일반적 원리로 자주 비약한다.
저녁 햇살이
음습한 지하실 환기창 틈새로
장검처럼 깊숙이
스며들 듯이
방금,
그 긴 칼을 맞은
내 캄캄한 옆구리에서
콸콸 흘러나온 검붉은 그늘이
서러운 식민지처럼
어둑하게 번져가네
- 이덕규, [그림자]
인용한 세 편의 시를 아래와 같이 도표화할 수 있다.
[저녁 운동장] | [노을] | [그림자] | |
스타일 | 리얼리즘 | 모더니즘 | (좁은 의미) 서정시 |
문체 | 환유적 | 감각적 | 은유적 |
어조 | 풍자 (주체>대상) | 예찬 (주체<대상) | 반성 (주체=대상) |
공간 | 운동장 (넓음) | 그림 (가상) | 지하실 (좁음) |
[저녁 운동장]은 현실의 한쪽 풍경을 환유적으로 그린다. ‘정복 차림의 어둠’이나 ‘운동장에 조그만 무덤’ 그리고 ‘문상 나온 별들’ 등은 모두 은유이면서, 현실의 무력을 환기하는 환유이다. ‘내 안엔 더 큰 어둠’이란 저항하는 자로서 두려움이나 자기 반성을 뜻할 터이다. 화자는 거대한 힘에 의한 현실의 곤궁과 우울을 직시하면서, 그 속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자기 단속을 하고 있다. 주체가 대상(현실)보다 윤리적으로 우월하다는 점에서 이 시의 어조를 풍자라고 할 수 있다. [노을]의 공간은 그림이다. 그 그림은 노을을 재현한 가상이며, 그림을 묘사하는 ‘나일론 치마를 불태우는 여자’나 ‘옥수수알의 노란 빛이 눈을 찌르는 오후’ 등 시어는 감각적이다. [노을]은 현실의 재현(그림)을 보면서 감각을 말하는 시, 즉 재현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은 그만큼 물러나 있고, 주체는 재현된 대상보다 아래 있다(그림을 감각한다)는 점에서 어조는 예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자]는 지하실에서 화자의 감상을 묘사하고 있다. 환기창 틈새로 들어오는 저녁 햇살은 장검이고, 화자는 그 칼을 맞아 피를 흘리듯이 그림자를 검붉게 드리우고 있다. 막연하지만 처연한 각성이 거기 있다.
송경동의 [저녁 운동장]에서 서정성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시가 특별히 비유적이기 때문이다. 진은영의 [노을]에서 역시 서정성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시가 묘사적이기 때문이다. 이덕규의 [그림자]에서 리얼리즘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시가 지하실 내 사적 체험을 모티브로 막연하게나마 어떤 역사성(명성황후 시해)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리얼리즘 시, 모더니즘 시, (좁은 의미) 서정시는 시의 세 가지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세 개의 원들은 서로 겹치는 부분들을 통하여 장단점을 상호 보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시의 세계에는 구심력만 아니라 원심력도 있어서 어떤 스타일 외곽으로 멀리 벗어나는 시가 독자를 멀미 나게 하기도 한다. 기실, 이 글에서 소개하고 싶은, 극복하고 싶은 시는 아래 것이다.
주인 - 김승일
그는 그의 별에 혼자 있다 그는 그의 생각만을 경험한다 사변적이다 그는 외계인이다 나는 내가 떠올릴 수 없는 외계인과 만나고 싶다 나는 그런 외계인과 만날 수 없다
사변적인 그와 나도 만날 수 없다 그에게는 발이 없고 눈이 없어서 그는 절대 이곳으로 올 수가 없다 어딘가에 그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 내게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그만 생각 중이다 그는 내 희곡에서 주인공이다 내 희곡은 무척 자폐적이고 지루하고 형편없단 평을 듣는다 이제까지 그가 나의 주인공일 때 내 희곡은 독백 방백 독백이었다
형편없는 연출가가 내 희곡을 공연하였다 연출가는 내 희곡을 출력한 다음 길 가는 자들에게 나누어 줬다 그것이 내 희곡의 공연이었다 나는 아주 형편없는 연출가였다
김승일(1987-)의 두 번째 시집 『여기까지 인용하세요』(문학과지성 시인선 534, 2019.11.22)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 같다. 시인이거나 비평가가 동호회 활동하는 차원에서 그런 시집을 읽는 것은 직업의식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 시집은 독자에게 읽으라는 어떤 유인도 윽박도 하지 않는다. 시인은 독자와 별거하는 시의 세계를 모색하는 듯싶다.
인용시 [주인]은 그 시집에서 짧은 것을 고른 것이다. [주인]은 ‘희곡’이라지만 스토리도 없고, 어떤 사건의 재현도 아니다. 등장 인물이라야 그, 나, 연출가 셋이고, 아마도 그 셋은 하나이다. 별에 혼자 있는 그, 그를 생각하는 나, 희곡을 공연하는 연출가,는 마치 만화에서 인물의 공상 속 인물의 공상 같은 세 겹의 가상처럼 보인다. ‘그는 외계인’이며, ‘그가 나의 주인공’이며, ‘나는 아주 형편없는 연출가’라는 1인3역은 이 시의, 더 나아가 시집의 성격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떤 현실의 재현이 아닌 시, 말하자면 가상의 자기 반영이다.
시가 현실의 재현이 아닐 때,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을 것 같다. 모더니즘 시라고 분류한 진은영의 [노을]처럼 재현의 재현(현실이 아닌 그림 같은 가상)이거나 미장아빔(mise en abyme, 마주보는 거울 속에 동일한 이미지가 무한히 반복되는 양태)처럼 재현을 벗어나는 예술의 자기 반영이거나 ([주인]에서 그, 나, 연출가는 일종의 자기 반영,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아예 어떠한 재현도 없는 시(가능할까?) 등 아닐까 모르겠다.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 시처럼, 예술만이 소비자를 무시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무시하는 듯할 수 있다. 시인이 새로운 것을 꿈꾸는 의기는 드높다. 새로운 것을 통해서만 예술뿐 아니라 삶도 갱신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새로운 것이냐, 낡은 것이냐, 세상만사가 그렇게 단순할까? 새로운 것 속에 낡은 것, 낡은 것 속에 새로운 것이 틀림없이 있다. 그것들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조절의 문제로 보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끝내 안 읽히는 시, 안 읽혀서 실패하는 시, 동호회에서 겨우 공유되는 시,를 새롭겠다는 시도 하나로 버티는 것이 아닐까? 어떤 시들은 그렇다. 어떤 평론들은 그렇다. 그것들은 독자가 읽으라는 게 아니라 동호회에서 돌려보기 위한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 읽지 않는 독자를 무시하고, 읽을 대상을 동호회원처럼 한정하는 현실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게 독자이다. 그들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시도 없다고 인정하는 꼴이다.
안 읽히는 시를 붙들고 있다가 버린 시간이 아까워서 투덜거려 본다. 동호회에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모두 좀 넣어 달라. 그렇게 동호회를 폐하라.
(2022.8.11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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