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놈이었습니다』 문학동네시인선 077, 2019.7.24
“님의 블로그니까 님 마음대로 해도 되겠으나, 님 마음에 들지 않는 남의 시 한 편 콕 집어 이러쿵저러쿵 잘하시네요. 일없이 무딘 칼부터 벼리지 마시고, 남의 시들 중에서 미덕을 살 만한 것부터 주목해 습작에 보탬이 되시길... [비밀댓글]”
내 블로그 [시시한 이야기]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2014년부터이다. 오래하고 있는 일이다. 2016년까지 글은 비공개로 막아두었고, 이후 글들은 공개로 하고 있다. 실력이 모자란 건 그때나 지금이나 도긴개긴이겠지만, 앞의 삼 년은 특히 부끄러워 막았고, 이후 글들은 좀 낫겠다 싶어 열어 놓았다. 그 기간 내 글을 흩어본 사람들이야 있을 것이다. 친구 두엇이 무슨 짓을 하는지 둘러본 일이 있다. 지인 몇이 또한 인사차 들르기도 했다. 어쩌다 읽은 횟수가 수십 건 되는 날도 있지만, 읽은 사람 없는 날이 더 많았다. 블로그 친구로 등록된 사람 하나 없는, 그저 내 삶의 한 부분, 넓은 바다에 흔적처럼 떠있는 섬 같은 것이 내 블로그다.
블로그 시대가 시들해진 것은 내가 블로그를 시작하기 이전이다. 그때 이미 트위터 같은 SNS가 대세였다. 나 역시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자주 보지만, 거기 취미를 붙이지 않는다. 온라인 친구를 사귀는 일에 관심 없고, 오직 내 글이 글이 되는 것을 희망할 뿐이다. 내가 블로그를 하는 이유는 내 글이 글이 되는 것을 증거하려는 몸짓이다. 블로그에 관심 없는 것은 나 역시 같다. 나 역시 남의 블로그 글을 찬찬히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 당연히 남의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본 일 없고, 지난 9년간 내 블로그에 댓글이 달린 것은, 있으나마나 친구와 지인 두엇이 짧은 인사를 남긴 것 이외, 없다. 이러한데 누군가 댓글을 달아 놓은 것을 보고 잠깐 흥분한 일은 그럴 만한 일이다. [비밀댓글]로 나만 보라는 것이지만, 내 욕을 한 것이므로 공개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내 깐에는 방어를 좀 해보아야겠다.
그 비밀댓글에서 나는 두 가지 타격을 느꼈다. 첫째는 시인들 시를 꼬집기보다 미덕을 읽으라는 조언이다. 둘째는 습작이라는 평가이다. 두 가지는 서로 엇물려 있다. 잘 쓰지도 못하면서 시인들 시를 가타부타 하지 말라는 뜻이겠다.
시인들 시를 읽는 일은 다양한 얼굴을 보는 일과 비슷한 면이 있다. 어떤 시는 쉽고, 어떤 시는 어렵고, 어떤 시는 불가해하기도 하다. 공부가 모자라서 그런 요해와 난해, 불가해의 차이를 느끼는 것이겠지만, 공부가 충분해도 아마 시는 그와 같을 터이다. 그런 차이를 알고 싶어서 시를 읽고, 안되는 글을 쓴다. 특정 시에 대한 나의 불만은 사실 나에 대한 불만이다. 요해와 난해, 불가해로 여전히 시를 구분하는 나의 부족에 대한 불만이다. 여기에 포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포부를 밝히기에 여전히 부끄럽다. 따라서, 시를 꼬집기보다 미덕 삼아 배우라는 지적에는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내 글이 정말 습작인가? 내 글을 습작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을 터이다. 최소한 ‘무딘 칼부터 벼리고 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한국어 문법이 어렵고, 나 역시 자주 틀리지만, 용법에 맞지 않는, 의미가 상충하는, 논리가 서지 않는 말은 피해야 하지 않나? ‘칼을 벼리다’는 말은 준비하라는 비유이다. 비밀댓글에서 그 말은 ‘무딘 칼이나 더 벼리시고’가 되었어야 한다. 그런 말로 나를 ‘습작’하는 연습생 취급하는 걸 받아들이기는 어렵겠다. 어쩌면, ‘일없이 무딘 칼이나 벼리지 마시고’라고 읽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 말은 재주 없는 분야에서 연습한다고 시간 버리지 말고, 그만 두라는 권유(?)일 수도 있다. 세상 안 되는 일도 있으니까, 암만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은 안되는 일일 터이다. 그렇게 읽을 수도 없는 게 그런 금지는 ‘습작에 보탬’이나 하라는 허용과 호응하지 않는다.
아무려나, 지나가는 누구라도 내 글을 읽어주고 꼬집어준다면, 블로그가 끝나는 시대(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블로그를 접는다고, 차세대 ‘티스토리’로 바꾸라고 한다) 댓글을 달아주는 수고에 인사하지 않을 수 없다.
뭔 말인지 알지는 못 하겠으나, 댓글에는 감사드립니다. 진심으로…
설파(說破)하는 뱀 - 이덕규
아무리 더러운 곳을 통과해도
먼지 한 톨 묻지 않는 그는 죽기 전에 절대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는 법이 없다지
추운 산 어두운 굴속에 들어가 잠을 잘 때에도 몸을 둥글게 말아 똬리를 튼 중앙에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장좌불와, 면벽좌선한다지
머릿속에 고인 오직 맑은 한 방울의 치명적인 깨달음만이 한겨울 유일한 식량이라지
저것 봐,
동안거 끝내고 탁발 나온
어느 야윈 선승이 들길 한가운데 가부좌 틀고 앉아 일갈(一喝)하는
저 날카로운 설파(舌破)!
- 마침내 말로서 바위를 꾸짖어 산산조각 내겠다는 것이지
이덕규 (1961-) 시인을 ‘남성적’ 시를 쓴다고 흔히 평하는 것 같다. 남자 시인을 남성적 언어를 쓴다고 말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의 언어는 어감에서 강하고, 그의 문장은 선언적 경향이 강해서 확고함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의 사유 방식은 지배적 태도를 보인다. 시인의 선어와 문장, 그리고 사유 방식을 조합하면, 이덕규 시에서 강한 ‘남성적’ 체취를 느끼게 마련이다. 그것은 그의 매력이면서 동시에 약점이 될 것도 같다.
“시라는 장르가 자주 취하는 깨달음과 성찰, 자기 고백적 특성은 타자를 대상화하는 우를 은폐하는 알리바이가 되기도 한다.” (윤은성, [관계성을 고민하는 생성의 언어] P207, 『아직 오지 않은 시』)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트렌드가 있는가 보다. “기술의 발달이 휴머니즘의 극복을 선도한다고 보는 ‘포스트-휴머니즘’” (성현아, [죄성을 극복하는 비인간의 ‘나’들] P119, 같은 책)이 그 한쪽이다. 휴머니즘은 좋은 말 같지만, 그 휴머니즘이 규정하는 인간의 범위에서 ‘이방인과 문명인을 구별’하고 ‘여성, 퀴어, 트랜스젠더 등의 소수자들이 야만의 비인간으로 치부’된다는 측면에서 차별적 이즘이다. 휴머니즘의 인간은 모든 인간이 아니라 정상인(장애인과 소수자들을 제외)이며 문명인(유럽 백인 문명인 같은 주류 이외 제외)에 한정하므로, 포스트휴머니즘의 한 축은 그런 차별적 인간관을 극복하려는 운동이다.
이덕규의 [설파하는 뱀]은 전형적 서정시의 하나이다. 화자는 이른 봄 들판에 나온 뱀을 본다. 화자에게 적대감을 보이는지, 겨울잠에서 풀려나와 먹이를 찾는지 머리를 치켜들고 갈라진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뱀이 있다. 화자는 그 짐승을 보면서 동안거 끝낸 선승 같다고 생각한다. 뱀은 선승 같고, 선승은 치열한 동안거를 거쳐 깨달음을 얻은 자이다. 뱀은 선승이며, 선승은 화자의 진면목이다. 결국 화자가 뱀에 이상형(理想型)를 투사하는 서정시의 동일성 원리가 성립한다. 무엇을 깨달았는지, 그 깨달음을 설파(說破)하는 내용을 알 수 없지만, 깨달음의 삼엄함은 시에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저 날카로운 설파(舌破)!’ 뱀의 혓바닥이 태생적으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날카롭게 일갈하느라 갈라진 듯 설파(舌破)한다는 말의 묘미가 거기 있다.
[설파하는 뱀]은 깨달은 무엇을 보여준다기보다 깨달은 상태를 이미지화하는 시다. 그 시에서 ‘타자를 대상화하는 우를 은폐하는 알리바이’가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런 말은 가령,
만취해서 만추의 거리를 걷는 밤이었어
길을 건너려는데 술에 취해 가눌 수 없는 몸을 가로등에 기댄 채 흐느끼던 앳된 여자애가 갑자기
허공에 대고 나직이 외쳤어
오빠,
(중략)
지금 이 늦은 가을밤, 바싹 마른 낙엽처럼 곧 바스라질 듯 저기 길 건너
우리들의 빨간 물방울 원피스가 위험하다
- 이덕규, [오빠] 일부
같은 시에서, 세상의 젊은 여성이 기댈 오빠가 없어졌다는, 세태비판적 시선에 도사린 ‘알리바이’를 꼬집을 수 있다. 그 시선을 선의로 읽으면, 세상 나약한 젊은 여성이 있고, 그들을 구할 백기사 같은 오빠가 있어야 한다. “믿어라, 믿는다, 손만 잡고도 한밤을 건너고 세상 어디든 다 갈 수 있다던” 오빠라도 이제 없다는 풍자적 시선 뒤에는 남성적 우월의식이 남아 있다. 강자와 약자,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이 남아 있다. 그것들을 은연 중이라도 편드는 한, 강과 선은 남성적인 것에 있다는 차별에 동조하는 셈이다.
시에 남성성을 운운하는 것은 여성성을 운운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다. 비난받을 만해서 위험한 것이기에 앞서, 그런 시선이 미처 피하지 못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휴머니즘을 극복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 휴머니즘의 휴먼이 좁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인 것처럼, 남성성을 극복할 필요가 시에도 비슷하게 있다. 자칫, 사내로 불리는 남자, 시인이라는 상찬이 이제 욕이나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이덕규는 탁월한, 그저 ‘시인’이어야 한다.
(2022.9.16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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