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말뚝에 묶인 피아노』 (문지사, 2015.3.2)
대개의 시론은 언어학에 많이 기대고, 근래 비평은 정신분석 이론에 많이 빚지고 있어 보인다. 프로이트, 라캉, 들뢰즈/가타리로 징검다리를 놓는 정신분석 이론은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것 같지만, 시를 이해하는데 너무나 번잡하다. 이승훈 시인이 『라캉으로 시읽기』(문학동네, 2011.9.23)를 암만 역설해도 그를 통해 라캉을 읽는 것도 벅차다. 그 책에서조차 시를 읽는 것은 몇 편 안되고 라캉만 읽고 있으니까, 사실 그 책은 그냥 ‘라캉읽기’에 머무르고 있대도 틀린 평가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시에서 정신분석 이론은 버거운 면이 있다. 그렇다고 정신분석 이론을 몰라라 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인간의 정신(심리)을 분석하는 과학이며, 시의 영역과 많이 겹치기 때문이다. 그 과학의 최근판은 들뢰즈/가타리이다. 들뢰즈(1925-1995)는 철학자이고 가타리(1930-)는 정신분석가이다. 두 사람은 정신분석 분야에 중요한 세 권의 책을 공저하여 마치 한 사람인 마냥 들뢰즈/가타리로 통상 불려진다. 그 둘의 이론은 ‘안티 프로이트’라고 할 수 있고, 그 둘의 첫 공저가 바로 『안티 오이디푸스』 (1972)이다.
들뢰즈/가타리 이론의 핵심을 한 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인간 심리의 단면을 설명해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아버지를 거역하지 말라는 압박이며 억압이다. 그것은 가부장제의 단단한 위계질서를 강제하는 것이다.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수직적 체계인 계통수(系統樹, arborescence) 구조라고 한다. 들뢰즈/가타리가 비판하는 것은 프로이트 이론이 가부장적 사회체제(나아가 자본주의 체제)를 위한 억압의 이론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억압은 결핍을 만든다. 들뢰즈/가타리는 수직적 체계인 계통수와 다른, 수평적인 관계인 근경(根莖, rhizome)을 내세운다. 오이디푸스적 수직적인 관계가 위계질서에 의한 억압 체계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근경의 수평적인 관계는 평등한 관계에 기초한다. (以上, 이정호 『텍스트의 욕망』제 9장의 내용 일부 요약임)
글쓰기에 있어서도 같지 않을까. 계통수적 글쓰기는 기승전결과 같이 구조화된 글이며, 그러한 글쓰기는 주장이며 강제이고 따라서 억압이다. 근경적 글쓰기가 있다면, 그것은 구조화되지 않은 수평적 결합 방식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열린 글쓰기일 수 있고, 독자가 글을 완성하는 글쓰기일 수 있다. 무슨 말인지, 아래 시를 그러한 수평적 글쓰기의 사례로 읽어본다. 이것은 다만 서투른 나의 해석이라는 것을 밝힌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 - 서영처
낡은 라디오에서 네 허리의 굴곡 같은 노래가
흘러나와 무쵸, 무쵸, 나를 끌어당길 때
돌아보면 나뭇잎 신록을 연주하는 가로수길
물방울무늬 머리띠, 꼭 낀 원피스를 입은 네가 핸드백을 흔들며 다가온다
광화문 네거리 손차양하고 신호등을 기다릴 때
눈시울 간질이며 바이올린의 고음 같은 햇살, 널 닮은 실루엣 그려내는지
건너편 길에 네가 서 있다
갸우뚱, 고개 젓는 사이 아스팔트 아지랑이 위로
너는 사라지고 나는 사람들에 떠밀려 길을 건넌다
인파 쏟아지는 역사 계단
지하철 입구를 구불구불 흘러 들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숙명이니 순정이니 늘어지는 유행가 가락 속에서
잡을 듯 널 놓치곤 한다
네 둔부처럼 무겁게 휘어지는 골목
불빛 희미한 담배 가게에서 흘러나온 노란 샤쓰의 사나이
추근거리며 옛 그림자를 한참이나 따라간다
서영처(1964-) 시인은 경북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영남대에서 국문학 박사를 받았다고 한다. 음악에서 문학으로 바이올린에서 시로 전향을 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에는 음악이 배경에 깔리는 경우가 많다.
위 시 역시 노래를 깔고 있다. 4개연에 각각 다른 노래가 흐른다. 아마도 무쵸는 ‘베사메무쵸’일 것이고, 2연에서 “바이올린의 고음 같은 햇살”을 노래라고 할 수 없지만 시인은 사물이나 현상에서 곧잘 노래를 듣는다. 3연은 숙명과 순정을 부르는 어느 유행가를, 4연에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가 들린다. 각 연마다 노래가 있고 그 가락 속에 어울리는 ‘너’가 보인다. 그것들이 구조화 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방에 펼쳐진 노래와 사방에 보이는 ‘너’는 수평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노래를 듣고 ‘너’를 보는 나(화자)만이 시의 일관성을 지탱한다.
말하자면, 이 시는 계통수적 글쓰기가 아닌 근경 - 수평적 글쓰기를 예시한다. 그렇다면, 이 시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시에서 무엇을 느끼는지 그것이 중요하다. 시에 산재한 ‘너’를 한 사람으로 읽어 도시의 거리마다 문득문득 보이는 듯한 옛사람으로 추억할 수 있다. 또 ‘너’를 자기 자신으로 읽을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노래는 선율이며 기억이며 삶의 현상이다. 노래를 듣는 가운데 보는 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면, 노래는 자신을 자신에게 회귀시키는 마법이다.
“나무가 영생을 얻는 길은 악기가 되는 길” (70)
노래를 듣고 노래 속에서 나는 ‘너’를 볼 수 있다. 추억하기에 가깝다. 나는 ‘나의 너’를 볼 수도 있다. 성찰하기에 가깝다. 무엇을 보는지 그것은 내 속에 들리는 노래에 따라 다르리라.
(2015.12.30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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