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오른손이 아픈 날』 (문지사, 2016.1.7)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라는 말이 가능하다. 통계적 근거를 대지 않더라도 어떤 단정을 하려면 말의 트릭이 필요하다. 그 말이 상식에 닿거나 논리를 품어야 한다. 이 말의 트릭은 ‘더러’에 있다. '많은 가운데 어느 정도'라는 그 부사 덕분에 이 말은 상식에 닿은 것처럼 보인다.
김광규(1941-)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우리를 사로잡는 김광규 시의 매력은 일상적인 생활의 언어가 창조하는 의미의 다층적 배치와 그것의 통섭에 있다. 그처럼 친근한 어법으로 시 읽는 재미와 삶의 깨우침을 동시에 안겨준 시인은 우리 시사에 흔치 않다.” ([해설], 127)
처음이나 지금이나 시인은 ‘일상적 생활의 언어’로 시를 쓴다. 열한 번째 이번 시집을 읽어보면 변함없는 시인의 언어가 있다. 그러나, 시인의 지향과 독자의 소득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시집 뒤의 [해설]에서, 또 일반적으로 시인을 그리 평가하는 것처럼, ‘시 읽는 재미’와 ‘삶의 깨우침’이라는 말은, 시인이 시를 쓰는 지향이면서 동시에 독자가 시를 읽어 얻는 소득이라는 두 방향으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그 둘은 전혀 다른 방향을 보이기도 한다. 시인이 암만 일상 언어로 시 읽는 재미를 지향하더라도, 삶의 깨우침을 그 언어로 포착하더라도, 그것들로 독자가 시 읽는 재미를 보는 것이나 삶의 깨우침을 얻게 되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의도와 다른 효과는 어디나 가능하고, 시는 더욱 장담하기 어려운 분야이다.
그의 시 가운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분명 사람들이 기억하는 시인의 대표작이고, [쓰레기 치는 사람들]은 내가 읽은 그의 좋은 작품이다. 두 시에는 일상과 일상의 부조리가 씁쓸하게 깔려 있다. 그의 시가 아름답게 읽힌다면,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언어가 기여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시적 성취에 더욱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의 시가 쉬운 것이나 그의 시가 각성을 지향하는 것은 시인의 특징일 뿐이다. 그의 시의 아름다움은 정작 쉬움과 각성의 함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가 엮어내는 어떤 부조리한 상황의 정렬(整列)에 있다. 그것이 성공적일 때 아름답고, 그것이 그의 시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모든 시에서 그렇게 성공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김광규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말은 언제나 참이다.
이번 열한 번째 시집에서 한 편을 골라 본다.
[녹색 두리기둥] - 김광규
전기줄 끊긴 채 자락길 어귀에
시멘트 기둥으로 홀로 남은 전신주
담쟁이덩굴이 엉켜 붙어
앞으로 옆으로 위로 펴져 올라가
우뚝 솟은 녹색 두리기둥 만들어놓았네
폐기된 전신주 꼭대기
담쟁이 더 기어 올라갈 수 없는 곳
바람과 구름을 향해
아무리 덩굴손 허공으로 뻗쳐보아도
이제는 더 감고 올라갈
기둥도 나무도 담벼락도 없네
살아 있는 덩굴식물이 한자리에
그대로 소나무처럼 머물 수 없어
제 몸의 덩굴에 엉겨 붙어
되돌아 내려오네
온갖 나무들 드높이 자라 올라가는
저 푸른 하늘에 앞길이 막혀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로 되돌아 내려오며
삶터 잘못 잡은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운 두리기둥 만들어놓았네
두리기둥(=둥근기둥) 장면을 나도 보았다. 똑같이 전신주에 담쟁이덩굴이 감고 올라가 삼각꼴로 풍성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넓은 벌판 뜨거운 뙤약볕 아래 그 담쟁이덩굴이 제 삶을 잘 꾸리고 있는 것인지 잘못 그리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는 못했다. 그걸 시인은 “삶터 잘못 잡은 담쟁이덩굴”로 그려낸다. 잘못 올라가 허공에 닿았다가 제 몸의 덩굴에 엉겨 붙어 되돌아 내려오는 그것, 그 운명 - 그래도 “아름다운 두리기둥 만들어” 풍경을 풍요롭게 한다는 그 꼼꼼한 시선이 바로 김광규 시인의 것이다.
잘못 자리잡은 그곳에서 풍경을 이루는 그것이 삶의 비극일까, 성취일까? 어쨌든 시인의 시적 매력은 그 부조리를 포착해내는 그것에 있다.
(2016.3.6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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