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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거친 글과 잘 쓴 글 - 박범신의 세월호 단상

저 밑에 김용옥 선생의 세월호 사건 격문을 읽은 유감을 나름 끄적여 본 게 있다. 같은 사건을, 같은 분노로 토해내는 박범신의 문장이 경향신문 오늘 자에 게재되었다. 소설가의 글은 과연 격이 다르구나 느낄 수 있는 문장이다. 도올 선생의 글은 거칠어 분노의 정서에 닿을 지 모르나, 오히려 선생이 바라는 선동(?)을 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글이 거칠면 감동은 없기 때문이다. 반면, 박범신의 글은 잘 짜여져 있으며, 잔잔하게 읽는 사람의 정서를 흔든다. 그의 문장은 정갈하고, 그의 논리는 상식에 바탕을 둔 비약 - 이게 글이 갖추어야 하는 글쓴이만의 해석이라 본다 - 을 보여준다. 글에서 그런 비약을 만날 때, 그런 글에 감동한다. 

내가 말하는 그 비약이란 이런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이 분노가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월호에 갇힌 생명의 마지막 귀가까지가 아니라, 안전을 위한 갖가지 대책이 열거될 때까지가 아니라, 세월호를 둘러싼 책임 소재가 가려지고 그들이 엄벌에 처해질 때까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나라에 의해 안전을 보장받고 그것을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 포만에 따른 범죄적 만족의 우상을 깨부수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길에 대한 속 깊은 비전을 회복할 때까지다." 

이런 문장은 오랜 숙련에 의해서만 가능할 거다.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 어째 작(作)이 중간에 걸려 있는 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가장 어려운 단계는 작(作)이 아니겠나. 박범신의 문장은 감동적이다. 모두 건투하기를 바라며, 박범신의 그 컬럼을 첨부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5142126475&code=990100 

아침 출근 길에 EBS를 듣는다. 거기 박범신의 책읽기 캠페인을 위한 짧은 발언이 매일 나온다. 그의 음성은 담배 오래 피운 사람의 목소리처럼 탁하지만, 그의 말의 내용은 꼭 그의 문장과 비슷하다. 소설가는 말과 문장이 거의 일치하는 부류인가 보다. 그는 말과 글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인정한다. 
(2014.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