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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7

고로쇠가 기독이 될 때까지 – 고진하, 고로쇠나무 우물

시집 『명랑의 둘레』 (문학동네시인선 076, 2015.11.10)

 

고진하(1953-) 시인은 강원도 어디 사는가 보다. 목사이자 시인. 시인은 목자(牧者)로서 연민하며 세상을 보듬으려는 것 같다. 그의 시집에서, 시절은 이른봄이기 일쑤이고, 너무 간섭한다 싶게 화자가 개입하거나, 언어는 낮은 단계 은유를 거의 넘지 않는다. 시인은 시라는 언어가 세상을 찬란하게 하는 게 아니라, 시라는 생각이 세상을 보살핀다고 믿는 듯하다.

 

독자의 입장에서, 긴장 없는 언어는 시를 읽는 흥미를 반감(半減)하기 마련이다. 그런 반감(反感)에 개의치 않고 시인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시인은 시인이기 이전에 목자라고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시를 높이 두기보다 더 높이 두어야 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하기는 독자보다야 99마리 양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99마리 순한 양보다 1마리 길 잃은 양이 더 귀하다는 예수님 말씀도 있다. 1마리 양이 독자라면 어찌해야 하나? 성경에서 로고스(말씀, 진리)를 읽는다면, 시에서는 좀 다른 것을 다르게 읽고도 싶다.

 

[고로쇠나무 우물]          - 고진하

 

그 오지에는 지금 갈 수 없으므로

그 오지의 빙설에 갇혀 있을 고라니 애인을 생각한다

이른봄의 궁기 털어낼 듯

아지랑이 피어올라 산허리를 친친 애무하고

혹한을 견딘 나목(裸木)의 팔뚝마다

연둣빛 꽃눈 톡톡 튀어올라

봄의 빗장 여는 소리로

곰배령 계곡은 잔뜩 들떠 있겠지만

아직 꽝꽝 얼어붙은 계류가 녹지 않아

물 한 모금 쉽게 마실 수 없을

고라니 애인의 목마름을 생각한다

길 없는 산길

더듬더듬 더듬어 올라가면

우람한 고로쇠나무 우물이 있어,

그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겨우 해갈의 기쁨을 누리고

그 우물에 상표를 붙이는 이들을 연민할

산토끼의 충혈된 눈도 생각한다

험준한 산등성이 헐떡거리며 넘던

구름 탁발승이 내려와

초췌한 얼굴 비쳐보고

기러기 순례도 깊이 빨대를 꽂고

그믐달 술래도 몰래 발을 적시고 갈

고로쇠나무 우물의

샛노란 빈혈에 대해 생각한다

늦게 해가 떠오르고 일찍 해가 떨어지는

곰배령 계곡

그 오지에는 지금 갈 수 없으므로

그 오지에서 사랑의 빈혈을 앓고 있을

멀대처럼 키만 큰 고로쇠나무 우물을 생각한다

 

고로쇠 물은 이른봄에 귀하다. ‘고로쇠물이라는 상품이 팔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고로쇠 물을 건강을 위해 마시지만, 자연은 그것을 생명의 물로 마신다. ‘아직 꽝꽝 얼어붙은 계류가 녹지 않아 물 한 모금 쉽게 마실 수 없을 고라니가 간신히 마시는 고로쇠 물이다. 마치 우화처럼, 고로쇠나무 우물이 있고, 두레박을 내려 그 물을 마신다고 하였지만, 고로쇠나무는 우물이 아니고, 고라니는 두레박을 도구로 쓰지 않을 터이다. 고라니는 이빨로 나무 줄기를 상처 내고, 고로쇠나무는 상처에서 물을 내놓을 것이다. 그것은 기독(基督)에 흡사하다.

 

위 시는 낮은 단계의 은유와 높은 단계의 은유를 다 포함한다. 낮은 단계의 은유란 단어간 은유를, 높은 단계의 은유란 시 전체가 품는 개념적 은유를 말한다. 고라니 애인, 고로쇠나무 우물, 구름 탁발승, 기러기 순례, 그믐달 술래 등등은 시인이 잘 활용하는 낮은 단계의 은유이다. ‘고라니(라는) 애인혹은고로쇠나무(라는) 우물에서 조사를 탈락하여 아예 두 명사를 병치하는 형식은 낯선 감이 없지 않다. 두 단어는 의미에서 바짝 붙어 은유의 함의를 제한한다. 단어간 은유는 대개 낮은 단계의 은유이다. 고로쇠나무가오지에서 사랑의 빈혈을 앓고있다는 것은 시가 품는 개념적 은유이다. 사랑에도 총량의 법칙이 있는지, 사랑을 나눠주던 기독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것처럼, 고로쇠나무는 빈혈을 앓는다.

 

시인은오지의 빙설에 갇혀 있을 고라니 애인을 생각한다. 곤란한 세상에는 목마른 애인뿐 아니라 길 잃은 양도 있다. 1마리 양은고로쇠나무 우물에서 목을 축이지 않을지 모른다. 1마리 양은 고로쇠나무가 기독이 되는 것을 다만 기도할지 모른다.

 

(2017.7.1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