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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7

시는 이 시대를 어떻게 기억하나 – 박연준 [울음 안개]

시집 『베누스 푸티카』, 창비시선 410, 2017.6.19

 

  “이 글의 주된 주장은 한국시의 흐름이 2000년대의 윤리적 모험에서 2010년대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변화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텐데…” (김나영, 평론 [통감하는 주체, 유무의 경계 너머의 말들], 『창작과비평 2017여름호』 중에서)

 

  2000년대 많은 시에서 시적 주체가 10대로 시선을 낮추고, 어린 주체는 자연히 윤리적 모험이라 할 만한 일탈 내지 반항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시적 주체의 연령을 낮추는 유행(?)도 그리 오래 갈 수 없었다. 2010년대 시에서 시적 주체는 시인의 연령으로 귀환하고, 그들의 윤리 역시 책임감을 회복하려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윤리나 그 책임감을 떠안는다는 것은 시인의 선택이면서 필연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대가 부여한 과제이고, 시는 특유의 감수성으로써 윤리의 회복을 기도(企圖)한다. 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적다고 하더라도, 시가 진리의 영역에서 손을 놓더라도, 미감(美感)을 최후의 보루로 삼더라도, 윤리라는 선()의 전선을 사수하려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2010년대 역시 아픈 시대이다. 그 아픔은 저항으로 깰 성질이 아니다. 2010년대 시가 윤리적 책임감에 시선을 준다는 것은 합당하고, 따라서 다행이다. 2010년대는 세월호 침몰로 기억될 것이다. 그 참담한 사고는 가만 있으라는 사고 즉시와 이후 권력의 무심(無心)과 이기(利己)로 더욱 분노를 샀다. 근래 선체는 인양되었지만, 인간과 사회의 윤리가 함께 인양되었다고 할 수 없다. 2010년대 시의 윤리적 책임감은 아마도 여기서 비롯할 것이다.

 

[울음 안개]          - 박연준

 

윗집 아이가 운다

울음에 손톱이 돋아 허공을 긁고

아랫집 천장을 긁고

한낮의 정적에 미세한 홈을 판다

 

아이가 운다

울다 오초간 악을 쓴다

악을,

악을,

악을,

 

악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이리도

지루하고 어두울까

 

아이의 발끝에 숨은 살기가

다섯해 동안 소량씩 모아온 악이

안개가 되어 우리 집 천장을 뚫고

바닥에 고인다

 

찢을 수도

닦을 수도

견딜 수도 없는

울음 안개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기다린다

쏟아질지 모르는 삶의 저의(底意)

어떤 벼랑,

어쩌면 비밀과 비밀을 찔러 죽일

뾰족함

 

  박연준(1980-) 시인의 세번째 시집이다. 『베누스 푸티카』(Venus Putica)비너스 상이 취하고 있는 정숙한 자세를 뜻한다는데, 그 시집은 서정적 감수성으로 일견 아름답고 언뜻 모호하게 정념과 대상과 사건을 그려낸다. 그 시집에서 주목할 것은 여럿 있지만, ‘윤리적 책임감을 말한다면, 자칫 시적 교만에 불과한 계몽의 자세를 멀찍이 벗어나 그저 감각으로써 윤리를 보여준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때 윤리적 책임감에는 어떤 선도적 역할도 위선일 수 있다는 선험(先驗)이 이미 있다. 시사(詩史)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거명할 필요는 없다. 윤리는 지도(指導)할 일이 아니라 공감할 일이다. 그쪽이 오히려 효과적이고 강력하고 아름다울 것 같다.

 

  위 시는 층간소음을 모티프로 삼는다. 살인도 난다는 층간소음을 시는 윗집 아이가 우는 한낮의 사건으로 그려낸다. 울음에 손톱이 돋아 허공을 긁는다는, 울다 악을 쓰는 악이 지루하고 어둡다는, 아이의 발버둥이 집 천장을 뚫고 바닥에 고인다는, 은유들은 추()의 미에 도달한 문장들이다. 위 시에서, 악을 쓰는 다섯 살 아이를 방치하는 윗집의 무례를 읽을 수도 있고, 악을 써야 달성되는 삶의 어떤 저의(底意), 혹은 비밀과 비밀이 새고 드는 값싼 삶의 방벽(防壁), 아니 서로 찔러 죽일지 모르는 뾰족한 충동을 읽을 수도 있다. 그것을 쓴 자가 강요하지 않는, 읽는 자의 감성에 맡길 뿐이다.

 

  2010년대 시가 윤리적 책임감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은 일견 극복이다. 박연준 시는 전대(前代)를 극복하는 한 표본이다. 시가 윤리를 강요할 때 시는 그저 위선이다. ‘윤리적 책임감이라는 말은, 뒤를 무겁게 하여, 윤리로부터 위선을 걸려내는 시의 포즈이다. 윤리가 당신과 내게 동시에 요구되는 타율이라면, 책임감은 자율이다. ‘윤리적 책임감이란 시가 강요하지 않고, 품는 것이다. 그 품은 것 박연준 시는 그 물성의 감각을 보여준다. 그 감각이 좋다.

 

(2017.9.22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