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시인선 032, 2012.12.5)
영화 『라라랜드』(La La Land ; LA지역 또는 환상의 세계를 뜻한다고 함)를 뒤늦게 보았다. 사랑과 꿈에 얽힌 인생 드라마, 뮤지컬 영화이다. 영화는 여러 차례 관점을 바꾼다. 세바스찬(남자 주연, 라이언 고슬링)이 보는 시선과 미아(여자 주연, 엠마 스톤)가 보는 시선으로 줄거리가 반복된다. 영화에서 관점을 바꾸는 기법은 꽤 오래되었다. 2008년에 개봉한 『밴티지 포인트』는 현장에 있던 8명의 관점으로 사건을 지루하게 반복한다. 관점을 바꾸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라라랜드』에서 세바스찬과 미아의 관점이 교차되면서, 그 둘이 어떻게 운명적으로 얽히고, 어떻게 영화처럼 서로를 떠나는지, 관객은 나름 관점으로 감동하게 된다.
시에서도 관점은 바뀐다. 시의 관점이 바뀐다는 것은 화자가 바뀐다는 말이다. 시의 화자가 바뀌면, 시는 같은 것을 다른 듯이 말할 수 있게 된다. “자아를 주체화하고 타인을 타자화하고 자연을 상처화하는 세 가지 길”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186)이라는 ‘서정적인 것’을 ‘시적인 것’으로 해소하는 방법의 하나가 거기 있다. 세상을 자아(시인의 시선)에 가두지 않고, 주체(시인을 포함한 누구의 시선)로 열어놓을 때, 세상은 진면목(眞面目)에 보다 가깝게 드러난다. 자연뿐 아니라 삶이 아름답기보다 상처에 가깝다는 진실을 말하려면, 영화든 시든 관점을 둘 셋 그 이상도 가질 필요가 있다.
[기억하는 일] - 박준
서기 양반, 이 집이 구십 년 된 집이에요 이런 집이 동네에 세 집 남았어 한 집은 주동현씨 집이고 한 집은 박래원씨 집인데 그이가 참 딱해 아들 이름이 상호인데 이민 가더니 소식이 끊겼어 걔가 어려서는 참 말 잘 듣고 똑똑했는데 내 자식은 어떻게 되냐고? 쟤가 큰아들인데 사구년 음 칠월 보름 생이야 이놈은 증손주야 작년 가을에 봤지 귤도 좀 들어 난 시어서 잘 못 먹어 젊어서 먹어야지 늙으면 맛도 없지 뭐 젊어서도 맛나고 늙어서도 맛난 게 있는데 그게 담배야 담배, 담배는 이 나이 먹어도 똑같긴 한데 재작년부터 기침이 끓어서 요즘은 그것도 못 피우지 참다 참다 힘들다 싶으면 불은 안 붙이고 물고만 있어 그런데 서기 양반은 죽을 날만 받아놓고 있는 노인네가 뭐 예쁘다고 자꾸 보러 온대
구청에서 직원이 나와 치매 노인의 정도를 확인해 간병인도 파견하고 지원도 한다 치매를 앓는 명자네 할머니는 매번 직원이 나오기만 하면 정신이 돌아온다 아들을 아버지라, 며느리를 엄마라 부르기를 그만두고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고 며느리를 며느리라 부르는 것이다 오래전 사복을 입고 온 군인들에게 속아 남편의 숨은 거처를 알려주었다가 혼자가 된 그녀였다
박준 (1983-)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온통 서정시로 꾸려져 있다. 익숙한 서정이기 때문일까? 내가 가지고 있는 그의 시집은 1판 30쇄 2017년 4월 18일, 그러니까 첫 출간 이후 4년여 만에 30쇄가 팔렸다. 이유가 무엇이든 시집이 잘 팔린 것은 이 시대 기쁜 일이기는 하다.
위 시는, 앞 연에서 그의 시집에는 드물게 할머니가 화자이다. 할머니 화자는 독거 노인 확인 차 방문하는 구청 직원에게 이미 했음직한 말씀을 늘어놓는다. 할머니의 한담(閑談)은 치매기가 걷힌 서울 사투리이다. 뒤 연에서 관점이 바뀐다. 그것은 작가의 내레이션인데, 구청 직원이 나오기만 하면 정신이 돌아오는 할머니의 상태를 설명해 준다. 할머니에게 구청 직원은 ‘오래전 사복을 입고 온 군인들에게 속아 남편의 숨은 거처를 알려주었다가 혼자가 된’ 상처를 환기하는지도 모른다. 치매기조차 물리치고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서기 양반’은 혼란하던 시절 ‘사복 입은 군인’의, 삶에 부과된 상처의 환유이다. 할머니에게는 물론 시를 읽는 독자 일반에게, 그런 환유는 시가 관점을 바꾸어 보여주는 영화적 기술(記述)이다.
“ ‘서정적인 것’을 보다 포괄적인 개념인 ‘시적인 것’ 속으로 해소시켜야 한다” (신형철)는 주장을 수용하면, 박준의 첫 시집은 ‘시적인 것’에 미달한다. 그 시집은 그리움, 우울, 곤궁 같은 대개 익숙한 서정의 영역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시로 미루어, 그가 ‘서정적인 것’을 부러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젊음에서 털어내야 하는 통과의례일지도 모르고, 사는 동안 기댄 사람(들)에 대한 예우인지도 알 수 없다. 어떻든 그의 ‘서정적인 것’으로 이룬 문장의 성취는 아름답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23)‘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37)‘한 동네 안에서 집을 옮기는 사람들의 방에는 옷보다 못이 많았다’ (57)
그의 선택은 아무튼 1판 30쇄로 성공적(?)이었다. 그가 ‘서정적인 것’에 남을지 ‘시적인 것’으로 넘어갈지 다음이 궁금하다.
(2017.10.10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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