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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7

불편한 진실, 노인을 위한 시는 없다 – 박연준 [전동차 안에서]

시집 『베누스 푸티카』, 창비시선 410, 2017.6.19

 

[전동차 안에서]          - 박연준

 

노인은 바지 앞섶을 움켜쥐고

앞뒤로 몸을 흔들며 앉아 있었다

기도하듯이

 

참을 수 없는 것과 참을 수 있는 것의 항목들이

엉클어지며

죽은 날들이 가고 있었다

 

늙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과 시간이 한데 모여

경화를 위해 엎드리는 일

 

휘몰아치는 바람의 요의(尿意)

온 세상 바람이 노인에게 몰려오고 있는 걸까?

 

당신이 앉은 곳에서 내 엉덩이까지

비스듬히, 계절이 흘러들지도 모른다고

참았던 노랑이 한꺼번에 쏟아질지도

모르겠다고 빗금으로

생각을 그으며 지나가는 오후

 

아무래도

 

가을을 떠난 노랑은

아무래도

 

노인을 보는 시선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은 아마도 연민과 혐오일 터이다. 그 둘은 상반된 태도 같지만,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두 개의 가지이다. 늙음을 부정(不淨)하다는 인지(認知)에서 같고, 다만 감정을 드러내는 표정에서 다를 뿐이다. 누구나 늙지만 누구도 제가 노인이 될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도 같다. 칠십 세를 넘는 일이 마치 오지 않을 심판의 날로 착각하는 것도 같다. 인간의 세대 어디에도 호오(好惡)는 편재하기 마련이다. 노인을 향한 시선에서 유독 연민과 혐오가 두드러진 것은 생산과 소비를 우선하는 현대 문명의 편협에 다름 아니다. 시도 예외는 아니라서, 거기서 연민이나 혐오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제 몸 속의 동백을 다 흘려보낸 늙은이들, 귀청 때리는 트로트 메들리가 장송곡으로 들려오는 남해고속도로, 죽음도 한때, 나는 속도를 늦추고 관광이라고 쓴 영구차를 따라 천천히 조문을 간다.

   (유홍준, [오동도로 가는 問喪] 중에서)

 

고속도로 고속버스에서 트로트 메들리에 몸을 흔드는 늙은이를 아주 늙은이라고 할 수 없겠다. 해도 추태는 추태고, 늙은 추태는 더욱 추태라서, ‘관광이라고 쓴 영구차라고 비아냥 받는다. 여기서 연민과 혐오는 아예 짝패처럼 구분하기 어렵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기형도, [노인들] 전문)

 

기형도 시가 대개 그렇듯이 위 시는 매우 암시적이다. 봄의 공원 한쪽에서 꽃이 피고, 나뭇가지들은 목을 분지르며 꽃을 떨어뜨린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공원에 앉았는 노인들을 은유한다. 그들을 고통추악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눈매는 연민을 지나 혐오에 이른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 80년대 암울한 시대로 읽으면, 또 다른 암시가 숨어 있다. 그렇더라도, 노인들은 추악하다는 혐오를 지울 수는 없다.

 

박연준의 [전동차 안에서] 갑작스런 요의(尿意)에 바지 앞섶을 움켜쥐고 앉아 있는 노인도 그와 같다. 오줌 누는 일이 힘겨워지거나 갑작스런 요의에 곤란을 겪는 일이 다 노환(老患) 때문이다. 늙는다는 병은 얼마나 가혹한가. 위 시는 그 천형을 연민 어린 어조로 끌어간다. ‘아무래도 가을을 떠난 노랑은 아무래도말을 못 잇지만, 그 생략된 다음 광경을 희극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노랑이 터지는 순간, 전동차 안은 혐오가 가득할 것 같다.

 

연민과 혐오가 한 뿌리라면, 그런 것들 말고, 노인을 삶의 다양한 현상 가운데 하나로 놓아줄 필요가 있다. “젠더, 나이, 신체, 지위, 국적, 인종을 이유로 한 모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합니다라는 페미니즘 구호에 다행히 나이가 들어 있다. 노인에게서 지혜를 얻는 시절이 다시 없겠지만, 누구나 노인이 된다는 순리를 잊지 않는다면, 시에서 노인에 대한 연민과 혐오를 거둘 때도 되었다.

 

지금은, 내가 살아갈 / 가장 적은 나이” (황인숙, [송년회] 중에서) 조금 가볍지만, 지금은 내가 살아본 가장 많은 나이가 아니라 내가 살아갈 가장 적은 나이라고, 늙음과 노인을 삶의 단계 하나로 그저 긍정할 때도 되었다.

 

 (2017.9.28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