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 2017.7.19)
근래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번째가 발간되었다. 1978년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1호 시집으로 시작하여 근 40년 만에 500호를 채운 것이라 한다. 그 500호는 시선집인데, 1호부터 지금까지 55명의 시인들을 간택(?)하여 그들 시 2편씩을 등재하였다. 편집인 둘은 그들 시인선 중에서 대표작을 꼽았다고 한다. 더러 아쉬운 작품들도 없지 않지만, 거반 좋은 시들이 골라진 것은 틀림없다. 그 500호 시선집을 읽어보면, 1978년 이후 지금까지 한국 현대시가 흘러나온 면면을 대강(大綱)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은 바뀐다. 시도 예외는 아니다. 2000년을 어림하여 현대시는 눈에 띄게 바뀐다. 그 500호 시선집으로 말하자면, 시가 실린 250페이지 가운데 대략 200페이지 이후 시는 많이 다르다. 그 다름을 일반화하는 게 어리석더라도 ‘다른 상상력’이라 부르고 싶다. 그 시선집에서 앞에 선 시들은 우선 직관적으로 이해가 쉽다. ‘다른 상상력’이라 덧씌울 수 있는 뒤에 선 시들은 직관적 이해가 어렵거나 더러 불가해하기도 하다. 그것은 내가 나이 든 독자라는 탓도 있지만, 그들 시가 다른 것을 지향하는 데 더 힘입는다.
왜 다를까? 그것은 필연이다. 세월이 흘렀는데, 세상이 바뀌었는데, 시가 마냥 그 타령이라면, 얼마나 따분할까? 다만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따져 남기는 것이 있다면 좋겠다. 경제논리 같지만, 그것도 필연이다.
[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위 시는 황동규의 문학과지성 시인선 제1호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에 실린, 이번 500호 맨 앞자리를 차지한, 말하자면 시선집의 서시이다. 익숙한 시의 문법 때문에 낯설지 않고, 문장은 아름답고, 어조는 연민이다. 가령,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라는 문장이 그러하다. 길 위에 박힌 돌들이 마치 제 뜻으로 그러한 것처럼 얼굴을 가리고 슬퍼할 리 없다. 화자는 제 심정을 그렇게 돌 위에 던진다. 그것을 투사(投射)라고 하든 동일시라고 하든 세계의 자아화라고 하든, 서정시의 제일 원리는 아마도 이것이고, 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문장의 기술(記述)이 또한 이것이다.
몇 그루 잎 떨군 나무들 날카로운 가지로 하늘 할퀴다 – 최하림 [폐차장] 중에서
저기 저 비명 끝에 매달린 번개 – 김혜순 [한 잔의 붉은 거울] 중에서
나무들이 낮아지는 하늘을 흔들고 있다 – 조은 [나무는 부리 끝까지 잡아당긴다] 중에서
직립의 짐승처럼 비가 오래도록 창밖에 서 있다 – 조용미 [삼베옷 입은 자화상] 중에서
그 시선집 곳곳에서 이와 같은 문장들은 아름답다. 해도, 55명 시인들이 그런 투사의 기술을 너나없이 사용한다면, 시는 지루한 무엇이다. 안 읽히는 시가 지루하기까지 하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시인들의 몫이다. 해서, 현실은 동어반복이라도, 연애조차 뻔해도, 시는 같은 것을 다르게 말해야 할 당위가 있다.
[당신과 나는 꽃처럼] - 이장욱
당신과 나는 꽃처럼 어지럽게 피어나
꽃처럼 무심하였다.
당신과 나는 인칭을 바꾸며
거리의 끝에서 거리의 처음으로
자꾸 이어졌다.
무한하였다.
여름이 끝나자 모든 것이 와전되었으며
모든 것이 와전되자 눈이 내렸다.
허공은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가득 찼다.
누군가 겨울이라고 외치자
모두들 겨울을 이해하였다.
당신과 나는
나와 그는
꽃의 미래를 사랑하였다.
시청각적으로
유장하였다.
당신과 그는 가로수가 바라볼 수 없을 만큼
화사하고
그와 나는 날아가는 새가 조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신하고
나와 당신은 유쾌하게 떠들다가
무표정하게 헤어졌다.
우리는 일에 몰두하거나
고도 15미터 상공에 앉아
전화를 걸었다.
창가에 서서 쓸쓸한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보자
다시 당신이 지나가고
배후에 어지러운 꽃이 피었다.
이장욱의 시는 시집 『정오의 희망곡』(2006)에서 선별된 것이다. 대상에 감정을 투사하는 서정시의 문법을 아주 벗어났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가령, ‘꽃처럼 어지럽게 피어나’ 같은 문장이나, 꽃 그 자체가 당신과 나의 감정의 투사이다), 시는 전체적으로 서정시와 다른 문법으로 쓰여졌다. ‘당신’이 있다. ‘당신’을 부를 때 이름이나 ‘너’라고 부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그’라고 부를 수도 있다. ‘당신과 나는 인칭을 바꾸며 (…) 자꾸 이어졌다. 무한하였다’라는 언술은 ‘당신’이 ‘나’에게, 그 반대 방향 역시 마찬가지로 자꾸 서로에게 환기되고 있다는 말이다. 인칭을 바꾸는 호칭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기술(記述)이면서, 동시에 시를 의외롭게 만드는 시적 기술(技術)이기도 하다. ‘당신과 나’(내가 말할 때)는 때로 ‘나와 그’(당신이 말할 때)로 바뀌고, ‘당신과 그’(남들이 말할 때)로, 인칭을 바꿔 불려진다. 인칭이 바뀐다는 말은 화자가 바뀐다는 말이다. ‘당신과 그는 가로수가 바라볼 수 없을 만큼 화사’하다는 말은 주변 호사가들의 입방아일 수 있다. 시는 인칭을 바꿔 ‘나와 당신’을 애틋하게 서로에게 환기하고, 또한 시는 인칭을 뒤바꿔 뻔한 연애를 뻔하지 않은 듯 말하고 있다.
황동규 시인이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며 말하고자 하는 것이나, 이장욱 시인이 ‘당신과 나는 꽃처럼 무심하였다’며 말하고자 하는 것이나, 두 감상(感傷)은 그리 다른 것은 아니다. 황동규 시인이 감상을 오래된 기술(記述)로 대상에 투사하여 보여준다면, 이장욱 시인은 감상을 낯선 기술(技術)로 당신과 나조차 시의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새로운 것이 언제나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은 상호적이다. 낡은 것 없이 새로운 것이 없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낡은 것에서 오래된 아름다움을 읽고, 새로운 것에서 다른 아름다움을 읽을 수 있다면, 다 좋다. 같은 것도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이 그 책,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번째에 있다.
(2017.10.25 진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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