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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17

쓰여지지 않은 시 – 이해와 난해, 그 사이 것들

시집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 2017.7.19)

 

‘문학과지성 편집자는시는 난해하다는 선입견이 사라지고, 난해함 자체도 시의 스펙트럼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2017.11.3 [, 여전히 뜨겁다] 기사 중에서)

 

시를 읽을 때 독해력이 필요하다. 어떤 시는 직관적으로 이해가 쉽고, 다른 시는 직관적 이해는커녕 암만 붙들고 있어도 뭔 소리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 이해와 난해 사이에는 무수한 스펙트럼이 있을 것인데, 개인차에 따라 스펙트럼의 사이는 무척 달라질 수 있고, 시 자체도 나름의 색깔로 이해와 난해 사이 제 위치를 갖는다. ‘시는 난해하다는 선입견이 있다면, 그것은 시를 안 읽는 독자의 견해라고 할 수 있고, 난해함 자체를 시의 현상 하나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시를 꽤 읽는 독자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시가 세계의 의미나 삶의 각성을 지향할 때 시는 직관적으로 이해가 쉽고, 시가 제 나름의 존재를 구축하려 할 때 시는 난해를 더하기 마련이다. 시를 읽을수록 독해력이 늘기야 하겠지만, 시를 읽을수록 난해한 시가 더욱 예뻐 보인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고 보면, 시의 어려움은 삶의 어려움과 닮았다. 고단한 삶이 의미 있는 삶을 보장하지 않는 것처럼, 난해한 시가 더 좋은 시로 읽힐 가능성은 적다. 삶의 고난을 극복한다고 할 때 목적은 그 도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극복 이후 얻을 행복한 꿈일 것처럼, 시 또한 난해를 목적으로 세울 리 없다. 시가 난해한 이유는 시가 다름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부작용인 셈이다.

 

[구두 한 짝]          - 김정환

 

찬 새벽 역전 광장에 홀로 남으니

떠나온 것인지 도착한 것인지 분간이 없다.

그렇게 구두 한 짝이 있다. 구겨진 구두 한 짝이.

저토록 웅크린 사랑은 떠나고 그가 절름발이로

세월을 거슬러 오르지는 못, 하지. 벗겨진 구두는 홀로

걷지 못한다. 그렇게 구두 한 짝이 있다.

그렇게 찬 새벽 역전 광장에, 발자국 하나로 얼어붙은

눈물은 보이지 않고 검다.

그래. 어려운 게 문제가 아냐.

기구한 삶만 반짝인다.

             (김정환, 시집 『해가 뜨다』, 2000)

 

환유를 인접성의 원리라고 한다. 버려진 구두 한 짝으로 그 구두를 잃은 누군가를 말하는 기술이 환유의 인접성이다. 시는 찬 새벽 광장에 홀로 남은 구두 한 짝으로 그 주인의 기구한 삶을 읽어낸다. 시가 의미를 지향할수록 직관적으로 이해가 쉽고, 아름답다.

 

[가시]          - 이장욱

 

물고기는 제 몸속의 자디잔 가시를 다소곳이 숨기고

오늘도 물속을 우아하게 유영한다

제 살 속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짐짓 무시하고

물고기는 오늘도 물속에서 평안하다

이윽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사납게 퍼덕이며

곤곤한 불과 바람의 길을 거쳐 식탁 위에 버려질 때

가시는 비로소 물고기의 온몸을 산산이 찢어 헤치고

눈부신 빛 아래 선연히 자신을 드러낸다

            (이장욱 시집, 『죽은 자를 위한 기도』, 1996)

 

은유를 유사성의 원리라고 한다. 물고기 몸속의 가시로 시는 죽음을 은유한다. 죽음이름하여 가시는 물고기를 우아하게 유영하게 하고, 사납게 퍼덕이게 하고, 온몸이 산산이 찢긴 다음에야 선연히 자신을 드러내는 실재이다. 시는 가시조차 죽음조차 아름답게 말한다.

 

[얼룩말 현상학]          - 이수명

 

너는 얼룩말을 내리쳤다.

얼룩말의 목을 내리쳤다.

 

너는 이제 없다.

 

얼굴 없는 얼룩말들이

날마다 속삭이며

떼 지어 네게 엉켜들었다.

 

핑핑 돌아가는 얼룩말은 바람개비같이

얼룩말

얼룩무늬들이 빙글빙글

너를 태우고 다녔다.

 

너를 태운 얼룩말은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않았다.

얼룩말 위에서 너는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않았다.

 

하나의 얼룩말이

네게 갇힌 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모든

얼룩말에게

너는 갇혀버렸다.

           (이수명, 시집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2004)

 

난해한 시를 읽는 일은 누구나 어렵다. 때로는 인내를 갖고 거듭 읽어야 하고, 막히면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평론가들 역시 누군가 풀어낸 평론으로 시를 이해하기도 한다. 그것이 연구에 효율적이기도 할 것이며, 남의 이론 이후에 제 주장을 펼칠 여지는 얼마든지 남아 있을 것이다. 이수명 시인은 난해한 시로 악명(?)이 높다. 이수명 시를 읽으려면, 한참 들여다봐야 하는 수고와 함께 평론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해법이다. 평론가 황현산이 그 시집 뒤에 붙인 해설(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 재인용)에 따르면 위 시의 이해는 아래와 같다.

 

“우리 사고의 숙명적 조건인 언어는 엄격한 틀을 지니고 있고, 우리는 생각을 할 때도 이미 그 틀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의 조각들을 조합한다.”(같은 책, 437) 위 시는 그러한 우리의 사고를 제한하는 언어의 엄격한 틀을 깨려는 시도이다. 시에서얼룩말은 초원이나 동물원에서 실제로 볼 수 있는 얼룩말이 아니라 얼룩말이라는 언어이다. 실제의 얼룩말과 언어의 얼룩말은 같을 수 없다. 언어의 얼룩말에는 언어의 검열이 있다. 시인이 얼룩말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가 얼룩말에얼룩이라는 무늬가 주는 강한 인상 때문이다. 황현산은 얼룩말은 그 무늬에 의해 검열의 창살이다라고 말한다. ‘는 얼룩말의 목을 쳐 검열의 집착을 폐지하려 한다. 그런데 언어를 벗어나 사고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얼룩말이라는 말을 벗어나 얼룩말을 생각할 수 없다. 얼룩말의 목을 쳤다는 둥, 목을 쳐 얼굴 없는 얼룩말이 네게 엉켜들었다는 둥, 얼룩말에 갇혔다는 둥, 하는 일련의 과정은 얼룩말이라는 언어를 벗어나려는, 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사고의 혼동을 시로 그려내려는 것이다.

 

시가 다름을 모색하는 것은 거의 숙명이다. 이해와 난해 자체는 시의 지향이 아니다. 시는 다름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해와 난해, 그 사이 무수한 스펙트럼 어딘가에 자리한다. 내게 쉬운 시가 좋은 시일 수도 있고, 난해한 시를 도전 삼아 읽는 것도 한가한 유희가 될 수 있다.

 

이 세상의 깨달음과 지혜라는 것들이 대개 엇비슷하게 닮아 있다는 사실에 피로를 느끼는 독자들, 전언이 시의 최종 심급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습니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283)라는 말에는, 앞에 소개한 직관적 이해가 쉬운 두 시를 의심하고, 뒤에 소개한 난해한 시를 지지하는 의도가 읽힌다. 전언이 없는 시에 성공한 사례는 없는 것 같다. 가령 무의미 시를 주장한 김춘수의 시가 적어도 무의미에는 실패했다고 말해진다. 이수명의 시 역시 난해할 뿐 전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과 지혜의 전언과 그 식상한 피로감을 다 극복하는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영원히 쓰여지지 않을지 모른다. 그것을 쓰려고, 읽으려고 할 뿐이지 싶다.

 

 (2017.11.3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