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시한 이야기 2022

과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라 – 장승리, 반과거

시집 『반과거』, 문학과지성 시인선 531, 2019.7.30

 

  “’사물은 다른 사물에 의존해서 생성된다는 연기의 진리는 결과가 원인에 의존해서 생성될 뿐만 아니라 원인도 결과에 의존해 생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연기의 상호의존성은 상호인과성’(mutual causality)으로도 정의된다.”

-    진은영,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P110

 

  진은영(1970-) 시인은 전공이 철학이고, 비평가이기도 하다. 영화 『Queen』에서 프레디 머큐리는 나는 퍼포머야라고 했다. 그는 1985년 유명 가수ㆍ그룹들과 합동 공연한 라이브 에이드(Live Aid)에서 웸블리 스타디움을 꽉 채운 청중들을 사로잡으며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퍼포머인지 보여준다. 머큐리는 작곡하는 뮤지션이기보다, 노래 잘 하는 싱어이기보다, 청중을 감동시키는 퍼포머인 것에 자부심이 더 컸던 것 같다. 그처럼 진은영은 시인이기보다, 비평가이기보다, 스스로 철학자로서 더 뛰어난 것을 알고 있을까? 나는 진은영을 통하여 칸트를 니체를 불교를 다시 읽고 있다.

 

  석가모니께서 깨달은 요체는 잘 알려져 있다. 연기론(緣起論) – 흔히 인과론(因果論)으로 오해되지만, 연기론은 진은영이 맥을 짚은 대로 ‘상호인과성’(mutual causality)이라고 인과론을 뒤집는 개념이다. 원인과 결과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그 말에는 인식의 혁명적 전환이 있다. 배탈이 났을 때, 어제 먹은 음식 중 하나가 탈이었을 거라 짐작하기 쉽다. 대개 의심되는 음식을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특정하더라도 같이 먹은 다른 이들은 멀쩡한데 나만 설사로 괴롭다. 어떤 음식이 꼭 원인이고, 내 설사가 그 결과인지 알기는 사실 어렵다. 인과론은 어떤 것이든 음식을 그 원인이라 하고 설사를 그 결과라고 한다. 연기론은 음식의 조건과 나의 신체의 조건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서 내 설사라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본다. 인과론에서 그 음식은 과거의 사건이고 따라서 불변이며, 내 설사는 현재의 사건이고 따라서 필연이다. 인과론은 불변하는 과거와 필연인 현재를 어찌할 수 없다는 운명론에 닿는다. 인과론은 음험하다. 이데올로기에 유용되고, 내 삶을 과거에 원인에 허무에 족쇄 채운다. 연기론은 과거의 음식이 조건이고 현재의 내 신체 상태 또한 조건이라고 본다. 두 조건의 상호 작용에 따라서, 나는 설사가 나고 너는 무탈하다. 음식이 불변의 원인도 아니고 설사가 필연의 결과도 아닌 셈이다. 연기론은 자유롭다. 과거는 고정된 게 아니고,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 아니고, 미래는 따라서 운명이 아니다.

 

반과거          - 장승리

 

모든 아침은

가장 오래된 아침이야

 

과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마

 

절정의 목련 앞에선

늦었다는 느낌이 들어

 

다른 봄이

코앞이야

 

내가 멈춘 게 아니라

길이 멈춘 거야

 

그 길을 걷는 일을

멈출 수 없어

 

  장승리(1974-) 시집을 읽는 일은 감각을 경험하는 일이다. 시에서 각성을 경험하는 시대는 어느새 갔나 보다. 장승리 시는 꼼꼼한 언어로 느리게 제 감각을 전해준다. 나처럼 시를 빨리 읽는 버릇은 장승리 시집을 폈다가 당혹하기 쉽다. 시집 뒤 권혁웅 시인(나는 그를 비평가로 읽는다. 그는 시보다 비평에서 우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해설에 이르러서야 그 시집을 관통하는 감각이 따로 있는 것을 감탄하게 된다. 재미있지는 않다. 시에서 재미를 찾는 것 또한 나의 구습이다. 재미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할까? 거기 스토리는 물론 그림도 없고, 노래도 들리지 않는다. 시는 그저 심각하다.

 

  ‘모든 아침은 가장 오래된 아침이라는 언술이 눈길을 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떠올리게 한다. ‘오래된 미래가 결국 어떤 과거 헬레나는 티베트 라다크 지역의 삶의 방식을 생태적 문제를 극복할 미래적 가치로, 결국 미래에 구축되기를 바라는 예시로 본다. 그가 제시한 디테일을 전부 수용하기는 어렵겠지만, 과거의 삶의 방식에 미래가 도달해야 하는 모범이 있다는 대강에는 동의한다라는 반어법은 의미 깊다. 마찬가지로 모든 아침은 가장 오래된 아침이라는 시적 언술에는 과거에 대한 재해석, 가치부여가 있다. 시제이며 표제가 ()과거인 이유가 여기 있다. 모든 아침은 현재의 아침이며, 맞이하는 미래의 아침이며, ‘오래된과거의 아침이다. 3(三世 : 과거 현재 미래)의 아침이라는 인식은 연기론적이다. ‘과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마라는 후술이 또한 그러하다. 과거는 불변의 원인일 뿐이라고 인과론적으로 본다면, 거기 희망은 없다. 희망은 언제나 가능태이기 때문이다. 모든 아침(현재)이 오래된 아침(과거)과 새로운 아침(미래)상호인과하는 것이라면, 과거는 현재와 미래에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 나를 옭매는 것은 나의 과거가 아니라 나의 인식이다. 하여, 과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라.

 

  시가 대상에 집중하는 시적 묘사에서 멀리 나와서, 감각이나 인식을 드러내는 시적 서술을 채용할 때, 시는 어렵다. 인용한 시 [반과거]는 언어를 극히 절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적 묘사의 자장에서 멀리 벗어나지는 않는다. 장승리 시가 대개 그러하다. 천천히 읽고, 재미는 다른 데로 넘기고, 시를 의심할 때, 어쩌면 거기서 시를 읽는 효용이 불쑥 일어날 수도 있다. 장승리 시가 대개 그러하다.

 

(2022.2.18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