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민음의시 294, 2021.12.17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오감을 통해 지각하는 능력을 칸트는 한 마디로 감성(Sinnlichkeit)이라고 한다.”
- 진은영,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76
시에서 대상이라 부르는 것을 칸트는 물자체라고 한다. 칸트는 물자체를 불가지(不可知)라고 보았다. 가령, 우리가 보는 것은 물자체가 아니라 시각에 잡힌 상(像)일 뿐이다. 물자체와 시각적 상이 같다고 확신할 수 없다. 물자체가 사람의 감각에 잡힌 것을 표상이라고 한다. 칸트의 논리에 따르면, 사람이 인식하는 것은 물자체가 아니라 물자체를 감관으로 포착한 표상이다. 물자체는 불가지하고, 물자체를 포착한 표상과 그때 감각한 감성 그리고 그를 해석하는 이성(오성)이 칸트가 그린 인간의 인식체계 대강이다.
문학 작품은 ‘교훈 내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게 효용론의 입장이다. 교훈이라고 하면 맨스플레인(mansplain) 같은 반감이 있을 수 있어서, 그 말을 ‘의미 내지 재미’로 바꾸는 게 더 나을 듯싶다. 문제는 의미 내지 재미라는 문학의 효용이 낡은 이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째서 자유에는 피냄새가 섞여 있는가’(김수영 [푸른 하늘을] 중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최승자 [일찍이 나는] 중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날] 중에서) 같은 문장들은 문학의 효용 측면에서 높은 값을 받을 만하다. 그런 고부가가치(?)를 현재 시가 외면하고 있다면, 시는 왜 헛장사 하는지, 어떤 신제품을 내놓고 있는지, 그게 부가가치를 이전만큼 보장할 수 있는지, 나는 궁금하다.
칸트의 철학에 그 실마리가 있다. 의미 내지 재미는 이성의 영역이다. 시가 의미 내지 재미라는 효용을 거부한다는 것은 이성의 영역을 벗겠다는 의도이며, 갈 곳은 감성이다. 물자체는 불가지하고, 표상을 말하는 것은 ‘A는 A다’라는 동어반복이거나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 표상을 감각한 감성 - 그게 현재 시가 회귀하는 영역이고, 감성으로서 시가 도달하려는 것은 자기감각을 보여주기일 뿐 의미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왜? 현재 시는 이성의 분별이나 도그마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을 하는 셈이다. 감성에 머무는 시의 자기단속. 포스트 모더니즘 혹은 아방가르드, 무엇이든 현재 시는 거기서 젊은 자신을 위치한다.
근래 출판된 최재원의 시집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에서 그런 감성 취향을 읽을 수 있다.
외마디 - 최재원
문이 열린 사이에
두 개의 검붉은 몸이 날아들었다
빈 구멍을 찾아 달려들었지만 내 몸이 벗어날 구멍은 없다
비명을 지르며 길고 휭휭 뚫린 복도를 돼지가 달려온다
아이처럼 웅크린 돼지의 몸이 거꾸로 복도 벽을 넘어간다
머리부터 사라지고 순식간에 치마 종아리 플랫
잠시 거기에 있었던 것이 없던 일처럼
외마디 사라진다
나는 멈추었다 두 몸은 온데간데없다 아직 열린 문으로 바람이 숭
숭
들어온다
어두운 신발장에서 나는 편지를 받았다
사진 속 하얀 욕조 하얀 시멘트 벽에
새하얗게 치덕치덕 벽 속에 못처럼 박힌 머리
즙이 다 빠져나간, 메마른 얼굴
초점없이 하얗게 튀어나온 눈알이 뒤에서 나를 바라본다
내가 볼 수 없어도 나를 향한다
다이어그램으로 된 편지에 암호처럼 그려진 고통의 디자인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
외마디 문이 열린 사이로 소식이 몸뚱이처럼 날아들었다
최재원 시인은 대략 33세. 그는 몇 년 시를 쓰다가, 민음사가 주관하는 2021년 이상문학상에 아예 시집 한 권 분량인 60편의 시를 투고하여 기성(旣成)을 제치고 당선되는 기이한 이력을 보여준다. 등단하지 않은 습작을 시로 쳐주는 정도가 아니라 이상문학상 당선작으로 뽑아줄 만큼 기재(奇才)가 남다르다. 등단이자 입상한 작품들에 보태 시 79편으로 엮은 첫 시집이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이다. 그의 시작은 거의 무용담에 가깝다. 그는 허투루 뽑힌 게 아니다. 그의 시집은 현재 시의 추세를 보여준다.
인용시에서 사건은 불명확하다. 돼지가 복도로 뛰어들어온 사건과 내가 편지를 받는 사건이 겹친다. 두 사건이 그대로 사건들인지, 돼지가 복도를 날아다니는 충격과 편지에 예감되는 충격이 은유적 병치인지도 불명확하다. 중요한 것은, 돼지의 외마디 비명과 복도 벽면에 걸린 사진 속 ‘즙이 다 빠져나간, 메마른 얼굴’이 바라보는 음울한 시선과 그 시선을 뒤로 하고 ‘암호처럼 그려진 고통의 디자인’이라는 편지를 받는 화자가 말하는 감각이다. 그것들은 ‘외마디’ 비명 그대로 충격이다. 그 편지가 왜 충격이고 고통인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다만 감각이며, 거기 의미는 없고 감성이 있을 뿐이다. 시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있다.
의미는 독자의 몫이 아니다. 독자 역시 거기서 감성을 얻으면 그만이다. 시가 감성을 가리킬 때, 이성으로 의미 내지 재미를 찾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안 보는 어리석음이다. 해석은 의도와 다르기 일쑤이고, 통념이나 이데올로기가 간섭하기 마련이다. 달을 보려는 건 해석하려는 것이다. 지혜는 이렇게 전도된다. 달을 보지 말라, 내 손가락이 더 곱지 않은가?
(2022.3.29 진후영)
[사족] 비평에서 ‘현대시’는 그 시간 폭에 꽤 넓다. 1970년대, 60년대는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 1930년대까지 거슬러 가기도 한다. 사적(史的) 의미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일상 감각에서 현대를 50년, 100년까지 넓게 잡는 것은 하늘과 땅의 간격을 무시하는 것처럼 실감과 많이 다르다. 해서 ‘현대시’라는 그 광대한 보폭의 지칭을 대신하여 ‘현재 시’라고 써보았다. 그 말은 2020년 언저리인 현재 쓰이는 시 정도 의미이며, 대개 이삼십 대 시인들이 구사하는 시적 언술이 이전 현대(?)와 다르다는 구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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