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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2022

사물시와 관념시 – 박현수, 안경과 사랑

시집 『사물에 말 건네기』 울력의시 2021.6.10

  “문학이 치료제가 아니라 증상과의 동일시임을 지시한다.”

-    조강석, 『틀뢴의 기둥』, P128

 

  조강석(1969-) 교수는 쉽지 않은 비평을 한다. 그의 비평은 일반 독자가 알아채기 어려운 용어가 설명 없이 쓰여 있기 일쑤이고, 서양 철학자나 비평가의 복잡한 이론으로 자기 논리를 세우는 데 적극적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비평을 하는 셈인데, 그는 대학에서 연구하는 자신의 눈높이를 독자와 맞출 의도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를 읽는 일은 독서를 즐기는 일이 되기 어렵고,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일 같지 싶다. 아무나 못 보는 것을 전문가의 눈으로 보여준다,라고 할까?

 

  인용 문장은 그 비평서 중에서 [치유로서의 문학, 증상으로서의 문학]에서 옮긴 것이다. 그리스의 비극은 참혹하기까지 한 비극적 결말이 많았다는데, 섬세한 그리스인들에게 그런 비극적 결말들이 어떻게 치유와 구원이 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으로 그 비평은 시작한다. 그가 내린 결론은문학은 치료제가 아니라 증상과의 동일시이며, 증상을 나열하는 거기까지만 문학이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다. 문학이 직접적 치유나 대안이 되려 할 때, 문학이 권력이 되거나 도그마에 빠질 거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민주주의여 만세라는 80년대 저항을 상징하는 문장이 신새벽 골목길에 쓰이는 이유, 거기까지만 저항시가 쓰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이 증상으로써 문학을 하는 한 사례일 것이며, ‘민주가 되는 구체적 세상을 시현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시가 미지의 미래로 치유로 나갈 의지를 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문학에서, 각별히 시에서 진술 그 자체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정동(情動)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같은 면)는 진술은 매우 의미 깊다. 시는 진술 그 자체만으로 역할을 하는 것이며, 진술 그 자체만으로 이미지에서 정동으로 나갈 수 있게 한다는 말이 된다. 세월호 참사를 비극으로써 진술하는 많은 시들이 있고, 그들 대부분은 증상으로써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진술은 비극적 환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비극적 환기가 바로 증상이며 이미지이고 정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다. 시가 주는 것은 증상이지만, 희한하게도 독자가 얻는 것은 치유가 될 수 있다. 시의 마법!

 

1.  사물시

 

안경          - 박현수

 

저것은

누군가 벗어놓은 표정

 

다른 인상은

모두 지워지고

오로지

앞을 바라보는 골격만 남은

 

견인주의라든가

삶이라는

말이라도 생각하는 듯

골똘한,

 

  “사물시란 관념이 배제되고 사물만으로 이루어진 시다.” (김준오, 『詩論』, P167) 김준오 선생처럼 사물시를 정의할 경우 사물시를 찾아내기 쉽지 않을 거라 본다. 통상 관념과 정서를 구분하는 상식에 비춰보면, 어떤 생각을 드러내는 관념과 어떤 분위기(mood)를 드러내는 정서는 구분할 수 있고, 이런 류의 관념이 없는 관념시를 상정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사물과 관념을 이분(二分)하는 입장에서 보면, 관념에는 주체의 정서까지 포함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서 , 호오(好惡)가 빠진 관념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관념에는 정서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물시는 사물에 초점을 두는 시라는 정도로 정의가 축소되어야 한다. 사물에 비추어 어떤 관념 내지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 사물시의 현실태이기 때문이다.

 

  인용시 [안경]은 안경을 이미지하고 있다. ‘누군가 벗어 놓은 표정이며, ‘골격만 남은인상이며, ‘골똘한표정을 짓고 있다는 언술들은 안경의 적절한 이미지이다. 당연히 그런 묘사에서 독자가 얻는 것은 이미지만이 아니라 이미지가 주는 정서, 즉 관념이다. 그 시에 따르면, 안경은 벗어놓은 자의 고심을 대표하는 표정이다.

 

2.  관념시

 

사랑          - 박현수

숟가락

 

아웃국에

따뜻한 밥 말아

당신 입에 한 술 떠 넣어주고 싶은,

아무 것도 줄 게 없어

찬밥처럼 굳은

등을 가만히 안아주고 싶은,

식은 국 같은 당신의 저녁 움푹움푹 덜어내고 싶은

 

  관념시는 대상에 초점을 두지 않고 관념을 서술하는 시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현대의 많은 서술시들은 관념시라고 볼 수 있다. 전통 서정시가 대상을 빌어 정서를 포함하는 관념을 표현하고 있어서 직관적 이해가 쉽다면, 현대 서술시는 한 대상에 초점을 두지 않고 이미지를 나열하는 경향이 있어서 직관적 이해가 어렵다. 현대 서술시는 대상을 중심에 두는 게 아니라 드러내려는 관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현대시에서) 서술은 시간적 질서도, 인과성의 질서도 해체시킨 우연성의 원리에 입각해 있다삶의 파편들을 집합시킴으로써 사실과 사건을 차례로 배열한다는 서술 고유의 사전적 의미를 스스로 포기해버린 서술이다.” (김준오, 『문학사와 장르』, P83) 현대 서술시를 대강 관념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용시 [사랑]은 부제가 숟가락이다. 박현수의 근간 시집 『사물에 말 건네기』가 거진 사물시 모음이라고 할 때, 사물시의 틀에서 어느만큼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숟가락에 대한 이미지의 묘사가 아니라, 숟가락이 하는 떠먹는기능으로부터 착상한 시라는 점에서 관념시에 더 가깝다. 밥과 국을 떠먹는 그 숟가락으로 당신에게 떠먹여 주고 싶다는, 당신의 슬픈 저녁을 움푹움푹 덜어내고싶다는, 가슴 저린 이야기. ‘찬밥처럼 굳은 등이란 언술에 비추어 어쩌면 병든, 혹은 노쇄한 당신일 것 같다. 그런 당신에게 아웃국에 따뜻한 밥 말아 한 술 떠 넣어주고 싶다고 말할 때, 식은 국 같은 당신의 저녁 덜어내 주고 싶다고 말할 때, 그 시는 당신의 아픔과 당신을 향한 화자의 아픔을 같은 증상으로 보여준다. 그 아픔을 읽는 독자를 같은 증상으로 감염시킨다.

 

  사실 시를 사물시냐 관념시냐,로 구분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세계를 겨우 두 개로 구분하고, 흑백으로 선별하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시를 이해하는 큰 틀이 거기 있다는 정도. 시가 주는 것은 증상이다. 시는 거기까지 말하지만, 그 너머를 말하지 않고 말하는 그것이다.

 

(2022.12.16 진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