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017 (47) 썸네일형 리스트형 불편한 진실, 노인을 위한 시는 없다 – 박연준 [전동차 안에서] 시집 『베누스 푸티카』, 창비시선 410, 2017.6.19 [전동차 안에서] - 박연준 노인은 바지 앞섶을 움켜쥐고 앞뒤로 몸을 흔들며 앉아 있었다 기도하듯이 참을 수 없는 것과 참을 수 있는 것의 항목들이 엉클어지며 죽은 날들이 가고 있었다 늙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과 시간이 한데 모여 경화를 .. 시는 이 시대를 어떻게 기억하나 – 박연준 [울음 안개] 시집 『베누스 푸티카』, 창비시선 410, 2017.6.19 “이 글의 주된 주장은 한국시의 흐름이 2000년대의 ‘윤리적 모험’에서 2010년대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변화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텐데…” (김나영, 평론 [통감하는 주체, 유무의 경계 너머의 말들], 『창작과비평 2017여름호』 중에서) 2000년대 많은 시에서 시적 주체가 10대로 시선을 낮추고, 어린 주체는 자연히 ‘윤리적 모험’이라 할 만한 일탈 내지 반항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시적 주체의 연령을 낮추는 유행(?)도 그리 오래 갈 수 없었다. 2010년대 시에서 시적 주체는 시인의 연령으로 귀환하고, 그들의 윤리 역시 책임감을 회복하려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윤리나 그 책임감을 떠안는다는 것은 시인의 선택이면서 필연이기도 .. 새로운 것의 조건 – 서정학 [인스턴트 사랑주스] 시집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문학과지성 시인선 498, 2017.5.30) “서정은 새로운 가능성이 아니라 공인된 기율이다. 옹호되어야 하는 것은 충분히 평가되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이지 이미 공인된 지 오래된 미학적 기율이 아닐 것이다. (…) 서정은 옹호되기보다는 갱신되어야 한다.”.. 사랑은 언제나 새롭다 – 허은실 [소수3]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시인선 090, 2017.4.18) [소수 3] - 허은실 남자가 김치를 찢는다 가운데에다 젓가락을 푹 찔러넣는다 여자가 콩자반을 하나 집어먹는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남자가 젓가락을 최대한 벌린다 다 찢어지지 않는다 여자가 콩자반을 두 개 집어먹는다 왼팔을 식탁 위에 얹고 고개를 꼬고 있다 남자가 줄기 쪽에 다시 젓가락을 찔러넣는다 젓가락을 콤파스처럼 벌린다 김치 양념이 여자의 밥그릇에 튄다 여자가 쳐다보지 않는다 콩자반을 세 개 집어먹는다 남자가 김치를 들어올린다 떨어지지 않은 쪽이 딸려 올라온다 여자가 콩자반을 네 개 집어먹지 않는다 딸려 올라가는 김치를 잡는다 남자와 여자가 밥 먹는 것을 중단하고 말없이 김치를 찢는다 김치를 전부 찢어놓은 여자가 밥을 먹는다 말없.. 새벽에 바퀴를 끄는 까닭 – 허은실 [캐리어]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시인선 090, 2017.4.18) “시인들의 첫 시집이 많이 선택된 것은, 대체로, 내게 그 시집들이 그 시인의 최고 경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고종석, 『모국어의 속살』, 책머리에서) [캐리어] - 허은실 테이블을 닦던 조선족 여자는 입술이 우엉 꽁다리처럼 말랐다 한 줄 김밥으로 허기를 재우고 유리문 밀고 나선 새벽 청년의 캐리어 끄는 소리가 빈 거리에 울린다 큰 몸에 달리기엔 바퀴가 너무 작아 그런 것은 터무니없다 생각하는 사이 청년은 어느 골목으로 스며들고 바퀴 소리 푸른 골목을 오래 흔든다 대학로 명품 코믹 연극 노인이 포스터를 떼어 구루마에 싣는다 ‘2008.10.10∼죽을 때까지’ 구루마를 끌고 간다 조그만 바퀴와 실려가는 것들과 끌려가는 것들의 기울기.. 딸아이의 정치학 – 박노해 [바람이 돌더러] 시집 『노동의 새벽』 (풀빛, 1984.9.25) 20대 딸아이는 마냥 즐겁다. 사는 게 즐거운 그 얼굴을 보는 것으로 함께 즐겁다. 언제나 즐거울 수 있을까 걱정도 된다. ‘아들은 내 말을 주의 깊게 듣는데, 너는 내가 말하면 딴짓한다’고 딸아이를 훈계도 해 본다. ‘나는 가벼운 농담이 좋아. 무.. 혁명가에게 빚진 것, 시 – 박노해 [이불을 꿰매면서] 시집 『노동의 새벽』 (풀빛, 1984.9.25) “박노해는 ‘혁명적’ 시인이었다 (…) 그는 타자의 욕망에 사로잡힌 노동자 주체들을 자기 욕망의 ‘주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박노해는 이 ‘욕망의 변증법’을 통해 노동자 주체가 당시 한국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 영화에 앞서 시가 있었더라 – 황지우 [飛火하는 불새]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32, 1989년 17쇄) “임동확에 의하면, 1980년 5월 말에 황지우는 청량리 지하철 지하도 입구에서 ‘땅아 통곡하라’는 유인물을 뿌리다 체포되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계엄령 하의 합수부에 끌려가 모든 희망을 포기한 채 고문 기술자의 의도대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관련자가 되어야 했고, 연일 되풀이 되는 고문에 못 이겨 한 친구를 끌어들여 그가 받았던 물고문, 몽둥이 찜질을 당하게 만들었다.” – (이철송, 『황지우와 박노해, 증상과 욕망의 시학』, 78) [飛火하는 불새] - 황지우 나는 그 불 속에서 울부짖었다 살려 달라고 살고 싶다고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불 속에서 죽지 못하고 나는 울었다 참을 수 없는 것 무릎 꿇을 수 없는 것 그런 것.. 증언과 부언 – 황지우 [만수산 드렁칡·1]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32, 1989년 17쇄)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한 사람 고르라면 나는 서슴없이 이상(1910-1937)을 꼽는다. 둘을 고르라면 황지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상이나 황지우나, 내게 공통점은 이름하여 모더니즘에 있다. 이상의 모더니즘은 “모더니.. 시가 옮을 때, 옳을 때 – 임솔아 [옆구리를 긁다]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495, 2017.3.6) 임솔아 시집의 특이점 하나는 시집 뒤에 붙는 해설이 없다는 것이다. 거기서 평론가나 동료 시인 혹은 지인 더러 시인의 스승 등이 때로는 해설하고, 때로는 발문하고, 흔히 시인의 시력을 더듬거나, 몇 편 시를 설명하.. 이전 1 2 3 4 5 다음